작성자 관리인
작성일 2008-11-06 (목)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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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원 문중순례

공도공파종회 대의원 일동은 2008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3일간 아래의 일정으로 문중순례를 하면서 문물을 배우고 숭조돈목정신을 함양하였다.

 

※ 천안 오천재(烏川齋)를 출발하여 셋째 예판공(禮判公) 할아버님의 유적지 공주 염수재(念修齋) 봉심을 시작으로 대전 덕상 대의원의 작품 돌탑을 잠시 관람하고 격려한 뒤 김천 다섯째 판부사공(判府事公) 할아버님의 후손 집성촌이자 17세 학촌공(鶴村公) 승원(承元) 할아버님을 모시는 한천재(寒泉齋)와 넷째 형판공(刑判公) 할아버님 후손의 집성촌이자 17세 진사공(進士公) 송(松) 할아버님을 모시는 영정재(永正齋) 봉심을 마치고 팔공산유스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대구 큰 할아버님 호판공(戶判公) 후손의 집성촌이자 오천(烏川) 할아버님과 22세 태암(笞巖) 주(輈) 할아버님을 모시는 서계서원(西溪書院) 숭덕사(崇德祠)를 봉심하고, 함안 둘째 공판공(工判公) 할아버님의 후손 집성촌이자 오천(烏川) 할아버님과 19세 삼휴당(三休堂) 교(郊), 20세 소고(嘯皐) 원성(元盛), 금계(琴溪) 원좌(元佐), 22세 양졸정(養拙亭) 휴복(休復), 연암(淵菴) 만성(晩成) 할아버님을 모시는 도천사(道川祠)를 봉심한 뒤 순천유스호텔에서 이틀째를 보낸 다음날 장흥 넷째 형판공(刑判公) 할아버님 후손들의 집성촌이자 공도공(恭度公) 할아버님, 24세 청강(淸江) 승(昇), 25세 강동현감(江東縣監) 신립(信立), 27세 만수재(晩守齋) 민기(敏琦) 할아버님을 모시는 금계사(金溪祠)를 봉심 하였다. 이동하는 동안 문중을 쉽게 이해하도록 뿌리책자를 탐독하였고 대의원 서로가 자기문중 주변의 지역유래 몇 가지를 순방 순서별 소개하였다.

 

염수재(念修齋)가 있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지명 유래

 

세종이 세상을 떠난 후 1452년 세조의 왕위찬탈 쿠데타 세력에 희생된 세종의 정치적 동반자인 유학자 김종서는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어져 버려졌다.

 

후에 그 후손이 절제공 성선생의 다리 하나를 찾아내 장군의 고향 근처인 충남 공주시 자기면 대교리(한다리) 땅에 묻었고, 지금도 김종서 장군의 묘는 그 곳에 있다.

 

[김종서 장군의 다리 하나가 묻혔다고 하여 ‘한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다보니 한(大)+다리(橋) 즉 대교가 되었다. 그 한 다리와 대교를 한자로 의역하니 ‘긴 가랑이’ 즉 장기(長崎)가 된 것이다]

 

권력자들은 그들의 부정을 공권력을 앞세워 아무리 덮어 버리려 해도 후손들은 거대한 유학자를 그냥 보내지 않는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이 땅에 깊숙이 심어놓고 민초들의 각성을 바라며 도의를 지키고 살아가는 후손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한천재(寒泉齋)가 있는 경북 김천시 광명리(光明里) 지명 유래

 

조선시대에는 김산군 과곡내면에 속한 기로동. 배평 마을이었는데, 1914년 광천. 내방. 덕마루. 봉대를 합하여 광동명이라 하여 과곡면에 속하였다. 1934년 석현면과 과곡면을 통합한 구성면 소관이 되었으며, 1971년 상기. 중기. 하기. 배평. 도현을 광명 1동으로 나누었고,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1936년 병자년 수해 때 많은 가옥이 유실되고 수십 명의 인명을 잃은 마을 사람들이 도현 - 도미지에 새 터를 마련, 정착하여 생긴 마을이다. 면소재지에서 동남으로 5.5km 떨어진 감천 유역에 이루어진 넓은 평야지대에 산재한 5개 마을(상리, 중말, 하촌, 도현, 배평)로 송도봉. 연암봉이 서쪽에 솟아 있고 감천이 촌전역을 안고 흐른다.

 

상리는 선산 여 씨, 중말은 고성 이씨. 인천 이씨. 하촌은 성산 배씨. 고령신씨의 집성촌이었으나, 1936년 병자 홍수로 대부분 집을 잃고 고장을 떠났다. 기동은 조선시대 김산 5대 반촌의 하나였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기를. 기월. 기로(耆老)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단명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장수하기를 빌었는데, 달고 같이 변함없이 장수를 누리도록 마을 이름을 기를. 기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의 뒷산을 송수 봉이라 부르며, 앞산의 큰 바위는 마을 사람들이 백세까지 장수하도록 백세 탑이라고 하였으며 상리 앞의 봉우리는 연만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는 3개의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에 있는 순서로 상기(上耆). 중기(中耆). 하기(下耆)로 부르고 있다(최진동 <70> 외 5명).

 

② 도현(挑峴). 도지미

 

이 마을은 병자년 수해 때 기를 들에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살면서 생긴 마을로서, 돌아가는 고개에 위치하였다 하여 도지미. 도현이라고 부른다.

 

③ 배평(排坪). 바랫돌. 벼루들

 

하리 마을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서 감천이 흘러내려 오다가 굽은 지점에 침식되어 벼랑이 생겼으므로 벼루들 또는 바랫들이라고 부른다.

 

④ 광천(光川). 빗내

 

이 마을은 감천 냇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로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감천을 바라보면 빛이 많이 반사된다고 마을 이름을 빗내 또는 광천이라고 부른다.

 

빗내의 속내는 마을을 냇물이 빗겨 흐른다는 뜻으로 새기면 좋을 것이다.

 

⑤ 덕마루. 듬말

 

지금으로부터 수백 연전 강모와 이모란 역학자가 이곳에 와서 뒷산의 형세가 기러기가 떨어져 북향으로 날아가는 모양이라서 수려한 누각이 들어설 장소라 하였으므로 덕마루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은 듬말로 불리어 온다.

 

⑥ 내방(來方). 옴배미

 

이 마을은 오목하고 쏙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산모퉁이를 돌아야만 마을이 보인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올빼미 눈처럼 쑥 들어갔다고 해서 옴배미라 불렀다. 또 옛날에 과거보러 가던 한 선비가 이 마을의 친구를 만나고 나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후 다시 이곳의 친구를 예방하였다는 유래로 내방이라고 한다.

 

⑦ 봉대(鳳台)

 

병자년 수해로 인하여 이주된 촌락으로 마을 뒷산 모양이 대봉이 앉은 형상이라 하여 봉대라 부르고 있다.

 


 

경북 김천시 영정재(永正齋)가 있는 광기리(光基里) 지명의 유래


성주목 신곡면에 속한 기동과 접화리는 1906년 김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에 총독부령에 의한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김천군 감천면 광기동이 되었다. 1949년 8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릉군 감천면 광기 1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88년 동이 리로 변경되었다. 접화리는 1938년 10월 1일 면사무소가 전동에서 이전된 후 각 기관이 신설되어, 마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광기 1리는 김천시에서 6.9km 떨어진 구릉지대와 평야지대에 속한 곳인데, 997번 지방도로변에 면사무소. 우체국. 감천농업협동조합 감천분소. 감천초등학교 등이 들어서고, 서쪽은 천산기슭에 기동 마을이 이루어졌다.

 

동쪽은 야산과 구릉지로 광기 2리와 접하고 남쪽은 학교 뒤 원장을 경계로 도평 1리와 접하고, 서쪽은 은천산 정상을 경계로 도평 1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구만리들 중간을 경계로 광기 3리와 접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997번 도로가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그 유래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기 동(基洞)

 

조선시대에 성주 이씨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주변의 지형이 소쿠리에 밀개로 끌어 담는 모양이라 마을의 자리로서는 기본이 된다고 기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② 더푸리. 접화리(蝶花里)

옛날에 남녀가 부모의 눈을 속여 정을 통한다는 곳으로, 나비가 꽃을 찾는 곳이라 하여 접화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더푸리란 말은 정사를 뜻함이다. 현재 감천면사무소와 감천파출소. 감천농협. 감천초등학교. 감천우체국이 이곳에 있다.

 


 

③ 둥디이. 큰동네. 등당(登堂)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등을 달아 놓은 모양과 같다고 등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40여 가구가 살며 주로 이씨가 많다.

 

④ 뒷골. 광암(光岩)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에는 그 바위가 빛을 냈다는 전설이 있어 광암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특산물로 사과와 포도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

 

⑤ 안마을. 내동(內洞)

 

1864년 밀양인 박세웅이란 사람이 선산 해평에서 이주하여 고을 안이라고 안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10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산물은 사과이다.

 

⑥ 전동(田洞)

 

본 면소재지 접화리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옛날부터 밭이 많았다고 전동이라고 부른다. 27가구 중 최 씨가 주로 살며 과수원이 많다.

 

⑦ 배다리. 사촌(沙村)

 

옛날 감천을 나룻배로 건너다닐 때 이곳에서 배를 탔다고 하여 배다리라고도 한다. 현재 세 가구가 살며 모두 상점을 하고 있다. 또한 모래가 많이 쌓여 사촌으로도 부른다.

 

 


서계서원(西溪書院)이 있는 무태조야동(無怠助也洞)의 유래

 

무태조야동(無怠助也洞) : 면적 23.26㎢, 인구 6,544명(2001)이다. 함지산 동부에 자리 잡은 농촌지역으로, 택지개발사업이 추진 중에 있으나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촌락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무태조야동은 무태동과 조야동이 합쳐진 마을 이름이다. 무태동의 마을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이 동수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여 도주하면서 부하들에게 “쉬지 말고 빨리 가자(無怠以促足)”고 독촉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왕건과 신숭겸이 야행을 하던 중 이 마을 아낙네가 한밤중에도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게으름이 없다(勤織組而無怠平)”고 칭찬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야동은 약 300여 년 전 민란과 흉년을 피해 청도에서 이주해 온 김해김씨 상후공이 개척한 마을로, “문중 간에 서로 도우면서 살아라(門中爲助也)”라는 그때의 가르침을 받들어 후손들이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963년 대구시 북부출장소가 북구로 승격되면서 달성군 공산면의 동변동과 서변동을 편입하였으며, 1975년 서구 조야동을 북구로 편입하고, 동변동과 서변동을 통합하여 동·서변동을 신설하였고, 1981년 대구직할시 북구에 편입되었다. 1987년 동구 연경동을 동·서변동으로 편입하고, 동·서변동을 무태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95년 대구직할시가 대구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대구광역시 북구에 편입되었다. 1998년 무태동과 조야동을 무태조야동으로 통합하였다.

 

행정 동인 무태조야동은 법정동명과 행정 동명이 같으며, 법정동인 동변동·서변동·연경동·조야동을 관할한다.

 

문화유적으로 서변동 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은 함지 산의 남동쪽 능선 말단부로 금호강과 동화천이 합류하는 북서쪽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학봉 동쪽 기슭에 봉무토성이 있고, 고분이 있는 구릉의 정상에는 팔거산성이 있다. 전통 건조물로는 서계서원(西溪書院), 환성정(喚性亭), 이유재(履有齋), 심수재(心輸齋), 경암재(景巖齋), 추모재(追慕齋), 경모재(敬慕齋),영사재(永思齋), 서산정(西山亭), 금서재(琴西齋), 일신정(日新亭), 척첨수, 백운정(白雲亭), 채국정(採菊亭), 정관정(靜觀亭), 만송정(晩松亭), 원장루, 회연정사, 능성세가(綾城世家), 송계당(松溪堂), 화수정(花樹亭), 오사재(五思齋), 이우당(二憂堂), 효열각(孝列閣), 등이 있다.

 

팔공산(八公山) : 팔공산은 삼국시대부터 공산(公山). 악(中岳).부악(父岳) 등으로 불러 온 영남 지역의 명산(名山)이다. '중악'이나 '공산'의 명칭은「삼국유사(三國遺事)」「삼국사기(三國史記)」등의 기록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공산'은 현재의 팔공산을 칭하는 것이고, '중악'이라는 것은 신라 오악(五岳)의 하나로 부르던 명칭이었다.


「삼국사기」권32. <제사지(祭祀志)>에 기록된 삼산(三山)과 오악(五岳)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산악을 신격화하여 호국신군으로 받드는 산악숭배사상으로서 삼산 오악을 두었는데, 이를 대사와 중사로 표현하여 국가 최상의 제전으로 삼았다. 곧 신라의 대사삼산(大祀三山)과 중사오악(中祀五岳)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확장되는 신라세력을 상징하는 신라 최고의 호국성신(護國聖神)이었던 것이다.

신라 오악이라는 것은 동쪽 토함산(동악), 서쪽 계룡산(서악), 남쪽 지리산(남악), 북쪽 태백산(북악) 그리고 중앙의 공산(중악)을 지칭한다. 이는 곧 팔공산이 통일신라의 중심지적 위치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팔공산은 신라 호국성신인 오악의 하나로서 신라의 상징적인 존재로 국가차원에서 숭배되어 온 영산(靈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령스러운 땅에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는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 되었으며,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의 원찰지(圓刹地)로서 원찰 조성과 원탑(願塔)조성 등 융성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이 흐름은 고려시대에서도 계속되어 고려의 초조대장경(初彫大裝經)이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되고, 유가종(瑜伽宗)의 거봉인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 자정국사 자안(慈靜國師 子安)은 동화사(桐華寺) 주지로서 전국의 불교를 관장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이 땅의 불교를 호령하였다.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시대에도 은해사(銀海寺)가 인종태실수보사찰(仁宗胎室守譜寺刹)로, 파계사(把溪寺)가 영조(英祖)의 장수를 비는 원찰로서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는 등 팔공산의 법등은 계속 밝혀져 왔다.

이 같은 전통으로 이곳에는 현재도 수십 개소의 사찰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불교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

 

팔공산의 불국(佛國)은 영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방 세력의 거점 지였기 때문에 신라. 고려. 조선 등 왕조를 달리하면서도 계속 왕실의 호위를 받을 수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각 왕조의 중심적 불교문화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지방 호족 적이면서도 중앙왕실적 불국으로서의 팔공산의 불교사(佛敎史)는 군위 삼존석불을 비롯하여, 동화사 .은해사 등 도처에 남겨진 불적과 현존하는 사찰들에서 그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맥을 이어온 불교의 역사와 함께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남겨져 있는 이 같은 불적들을 보노라면, 마치 이곳에 불교의 모든 사상 형태들이 포함된 듯이 보인다. 아미타신앙, 미륵신앙, 밀교신앙 등이 시대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전개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에 따른 불교예술도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래서 시간성을 배제하고 본다면 팔공산은 모든 불교신앙이 집약된 듯 한 느낌을 갖는다.

팔공산은 신라시대 때는 공산(公山)으로 불리던 산이었는데 고려시대 때부터 팔공산(八公山)이라 불리었다.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계기는 고려태조 왕건이 후삼국시대를 통일하기위해 전쟁을 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태조 왕건이 가장 총애하였던 개국공신, 신숭겸 [申崇謙, ?~927] 장군이다.

 

신숭겸장군은 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시조. 광해주(光海州: 春川) 출생하였다.

 

918년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협력,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견훤(甄萱)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되자 김락(金樂)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악행을 자행하니 왕건이 사람을 신라에 보내 조문하고, 정병 5천을 거느려 공산 동수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다. 전투가 불리해 견훤 군사에 의해 포위되니 왕건 신변이 매우 위태로웠다. 이때 얼굴이 왕건과 닮은 대장 신숭겸이 급히 왕건을 숨기고, 자신이 어거를 타고 김락과 함께 역전했으나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견훤 군사가 신숭겸의 목을 베어 창에 꽂아 "왕건을 죽였다." 하고 가니 견훤 군사의 포위망이 풀어졌다.

 

본진에 돌아온 왕건이 신숭겸의 시체를 찾아오라 했는데, 머리가 없어서 발바닥의 칠성 점으로 확인하고 시체를 가져왔다. 곧 목공을 시켜 나무로 얼굴 모양을 만들어 붙여 의복을 갖춰 입힌 다음 앉혀 놓고, 왕건이 친히 제사한 후 극진히 장례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이후로 이 충신들(신숭겸, 김락장군을 포함한 8인의 장수들)의 업적을 기리고저 이들이 고려 태조 왕건을 구하고 최후를 맞은 이곳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徐樂齋 思遠(서낙재 사원), 孫慕堂 處訥(손모당 처눌), 郭槐軒 再謙(곽귀헌 재겸), 蔡投巖 夢硯(채투암 몽연), 朴摠管 忠後(박총관 충후), 李軍威 宗文(이군위 종문), 崔萬頃(최만경) 諸公(제공)과 뜻을 모아 義兵(의병)을 일으켜서 公事員(공사원)으로서 대장에 추대되신 22세 대구 입향조 笞巖(태암) 李 輈(이 주) 선조님의 창의 활동의 본산지였다. 이때 解顔倉(해안창) 점거왜병을 토벌하여 倭首(왜수) 삼명과 적졸 百餘給(백여급)을 참괵하였고, 漆谷(칠곡) 팔거에서 三戰三捷(삼전삼첩)의 전공을 세웠고, 전라도 長水(장수)에서 수천 왜병을 물리쳐서 招諭使(초유사) 鶴峯 金誠一(학봉 김성일)과 體察使(체찰사) 漢陰 李德馨(한음 이덕형)에게 크게 奬許(장허)를 받았다. 亂靖後(난정후)에는 褒薦(포천)을 굳이 사양하고 산림에 돌아가서 한 讀書士(독서사)로서 大邱鄕校(대구향교)를 중건하고 각처 祠院(사원)을 보수하여 후진양성과 鄕學振興(향학진흥)에 힘을 다하신 기록이 있다.

 

왕건과 견훤의 전투로 연류 하여 생겨난 지명을 살펴보면

 

무태(無怠) : 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전하는 지명으로고려태조 왕건이 동수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여 도주하면서 부하들에게 "쉬지 말고 빨리 가자.(無怠以促足-무태이촉족)"고 독촉하면서 무태라고 했다는 설과 야행하면서 이 마을 아낙네가 야밤에도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있어 칭찬하여 게으름이 없다.(動織組而無怠平-동직조이무태평)"는데 연유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연경(硏經) :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연경동 지역으로 무태에서 동화천을 따라 북동쪽으로 나아간 곳에 위치한 촌락 명칭인데, 왕건이 이곳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태조지(太祖旨) : 현재 경상북도 영천시의 서쪽 12킬로미터쯤에 있는데,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하여 퇴병하여 공산 밑 한 작은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조지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팔고개 :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 1동과 지묘 3동 사이의 고개로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격파하고 이 고개를 넘으면서 나팔을 불었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전탄(箭灘 : 살내) : 서변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왕건 군과 견훤 군이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진하니 화살이 물속에 쌓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옥(왕)산과 파군재(파군치) :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배하여 이 산에 올랐던 데서 옥(왕)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며, 옥산에서 몇 리 떨어진 고개에서 왕건이 견훤에게 대치했으므로 그 고개를 파군 재라고 했다고 전하며, 현재도 옥산과 파군 재라는 지명이 사용되고 있으며, 동화사와 파계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기도 하고, 현재는 대구시민들의 휴식처이자 드라이브 코스인 팔공산 순환도로가 잘 닦여 있습니다.

 

미리사 : 지묘동에 있었던 절로서 태조가 정기 5천을 이끌고 미리사 앞에서 견훤 군과 싸워 대패하자, 장군 신숭겸이 왕의 전복으로 바꿔 입고, 김락이 이를 수행하여 견훤 군을 유인했다가 전사했던 곳 입니다.

 

지묘동 : 신숭겸과 김락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교묘한 지혜를 발휘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독좌암 : 봉무동 토성 기슭에 있는 바위로 도주하던 왕건이 홀로 앉아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실왕리 : 평광동의 한 자연촌락 이름인데, 왕건이 숨어 있다가 나무꾼에게 주먹밥을 걸식하고 사라졌기에 실왕리 라는 지명이 되어 내려옵니다.

 

안심과 반야월 : 도주하던 왕건에게 반달이 도주로를 비춰주었던 데서 반야월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하며, 안심은 비로소 왕건이 마음을 놓았던 데서 유래합니다.

 

은적사 : 앞산의 사찰 이름으로, 왕건이 도망치면서 몸을 숨겼다는 데서 유래하며, 이곳에 태조 18년(936) 영조스님이 절을 세워 은적사로 불렸다고 합니다.

 

안일암 : 현재 대구광역시 남구 쪽에 있는 앞산의 사찰 이름으로, 도주하던 왕건이 이곳에서 편히 쉬었다 갔던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왕정과 장군수 : 왕정은 '안지랑골'에 남아 있는 우물로서 왕건이 이 물을 마셨던 데서 유래한다고 하며, 이 왕정의 물을 장군수로 부르기도 합니다.

 

임휴사 : 달서구 상인동의 대덕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왕건이 와서 쉬어갔던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무태(無怠)마을의 조산(鳥山, 造山)에 얽힌 전설

고려 초기(신라시대라고도 한다), 무태(無怠 :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세거하기 전 은 씨(殷氏) 집안이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무태(無怠)는 지금의 지형과는 무척 달라 마을 앞에 내(川)가 있었고 은씨들은 방우들(들 이름)에 살았다 한다.

 

은 씨 집안에는 대단한 부호(富戶)가 있었는데 명문(名門)답게 손님들이 끊일 새가 없었다. 은씨(殷氏)집 종부(宗婦)는 손님을 대접하느라 귀찮고 힘이 들어 어떻게 하면 손님이 오지 않을까 고심하였다.

 

어느 날 대사(大師)가 집에 시주를 오니 종부(宗婦)가 그 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손님이 어떻게 하면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스님은 집 뒤의 산을 파헤치면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질 것이라 하였다. 집안이 망(亡)하면 자연히 손님이 끊어지니, 그것은 집안을 망(亡)하게 하는 방책(方策)이었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망각한 종부(宗婦)는 남몰래 북(北)으로 보고 머리를 감고 몸을 깨끗이 한 후 하인(下人)과 인부(人夫)를 시켜 산(山)을 파 없애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산(山)을 파 내려 가니 학(鶴) 세 마리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 대사(大師)의 말은 적중해서 종부(宗婦)의 남편(男便)을 비롯해 은씨(殷氏) 집안의 남자(男子)들은 하나 둘 죽어 가세(家勢)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은씨(殷氏)집 종부(宗婦)는 그제야 뉘우치고 하인(下人)을 시켜 산(山)을 다시 이루게 하였으나 날아간 학(鶴)은 돌아오지 않고 집안의 살림도 다시는 일어서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학(鶴)이 날아간 그 산(山)을 가리켜 鳥山(조산)이라고도 하며, 은씨(殷氏)집 종부(宗婦)가 다시 산(山)을 돌로 쌓아 올리게 하였다고 하여 造山(조산)이라고도 한다.

 

당시(當時)의 은씨(殷氏)들은 최근(最近)까지 무태(無怠)에 겨우 2,3호(戶) 집안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다. 조산은 지금 고속도로(高速道路)가 산(山) 아래로 지나고 신도시가 개발되어 자리만 확인 될 뿐이다.

 

 

도천사(道川祠)가 있는 군북면의 유래

 

군북면 [郡北面] :경상남도 함안군 서부에 있는 면에 위치

면적(㎢) 80.46

남강(南江) 우안(右岸)의 평야지역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남강을 경계로 의령군, 남쪽으로는 방어산(530m)·괘방산(掛榜山:458m)·오봉산(五峰山:523m) 등을 경계로 진주시, 동쪽은 가야읍에 접한다.

 

면의 남부산지 및 남동부의 백왜산(伯倭山:366m)을 제외하고는 소하천들이 흘러 형성된 넓은 평야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외에 참깨·들깨 등 특용작물 및 배·사과·복숭아 등의 과수작물이다. 면의 동부에 군북광산 등 여러 개의 광산이 있어 광업중심지를 이룬다. 면내 월촌리(月村里) 와룡정(臥龍亭)의 벚꽃과 남강에서 낚은 잉어회 등이 유명하다. 면의 중부를 순천∼부산 간 고속도로가 동서로 가로질러 가야읍 및 인접한 각 군과 연결된다.

 

문화재로는 도천재 단서죽백(道川齋丹書竹帛:경남유형문화재 56), 방어산 마애불(防禦山磨崖佛:보물 159), 어계고택(경남유형문화재 159), 조안 묘소(趙安墓所:경남기념물 34), 원효암 칠성각(경남문화재자료 15), 함안군북 지석묘군(경남기념물 183), 서산서원(西山書院), 의상대(義湘臺), 금촌리(金村里) 3층석탑, 삼충사(三忠祠), 와룡정(臥龍亭), 송방사지 5층석탑(松放寺址五層石塔), 방어산성, 쌍절각(雙節閣), 원북재(院北齋), 채미정(菜薇亭) 등이 있다.

 

명관리 [明館里]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에 있는 리(里)이다. 오봉산 기슭에 자리한 산촌마을이다. 명동소류지와 새터못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덕곡, 서원골, 사그점골, 절못마을 등이 있다. 대덕곡마을은 큰 덕을 지닌 마을이란 의미에서 지어진 지명이다. 서원골마을은 도계서원이 자리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사그점골마을은 사기점이 있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절못마을은 절터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명관리에는 지방 유형문화재 제 56호인 도천재 단서죽백이 있다.

 

도천재 단서죽백 [道川齋丹書竹帛] : 조선시대 이휴복(李休復)에게 내린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책훈(三等策勳) 교서.

지정번호 경남유형문화재 제56호

지정연도 1972년 2월 12일

소장 인천이씨 문중

소재지 경남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536

시대 조선시대

크기 가로 198cm, 세로 38cm

분류 전적류(기타)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가로 198cm, 세로 38cm의 두루마리로 되었다. 1624년(인조 2)에 있었던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25년에 인원군(仁原君) 이휴복에게 내린 교서이다. 공신교서는 공신 각 개인에게만 발급되는 유일문서이다.

 

이 교서에는 해서체(楷書體)로 첫머리에 ‘교(敎) 갈성분위진무공신가선대부항순천군수인원군이휴복서(竭誠奮威振武功臣嘉善大夫行順天郡守仁原君李休復書)’라 하였고 공신으로 책훈된 사연과 하사된 노비 등의 내용을 기재하였다. 끝에는 공신 1등 3명, 2등 9명, 3등 20명 전원의 이름이 있고 사급연월일(賜給年月日)인 천계오년(天啓五年) 사월(四月) 일(日)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의 인(印)이 찍혀 있다. 뒷면에 ‘강석기(姜碩期) 제(製) 이무림(李茂林) 서(書)’라 씌어 있어 교서의 제작과 글씨를 쓴 사람이 명기되어 있다. 명관리 명광동 인천이씨 재실인 도천재에 보관되어 있다.

 

방어산 마애불 [防禦山磨崖佛]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郡北面) 하림리(下林里) 방어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입상.

지정번호 보물 제159호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방어산

시대 통일신라

크기 본존 전체높이 5m, 본존상 현재 높이 2.85m, 좌협시상 높이 2.45m, 우협시상 높이 2.64m

분류 불상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방어산. 보물 제159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59호로 지장되었다. 본존(本尊) 전체높이 5m, 본존상 현재 높이 2.85m, 좌협시상(左脇侍像) 높이 2.45m, 우협시상(右脇侍像) 높이 2.64m이다. 재료는 청석(靑石)이다. 마애불은 암벽에 새긴 불상을 말하는 것으로, 한국을 비롯하여 인도·중국·일본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수법도 양각(陽刻:浮彫)·음각·선각(線刻) 등 다양하다.

 

원래부터 바위를 매끈하게 다듬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은 석질(石質)이 더욱 고르지 못하고 아랫부분은 탈락이 심하다.

 

본존불은 약사여래상(藥師如來像)이며, 양협시보살상(兩脇侍菩薩像)은 본존을 향해 있다. 오른쪽 보살의 팔꿈치에서부터 ‘貞元十七年辛巳三月’이란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801년(신라 애장왕 2)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9세기 명문불상(銘文佛像)의 최초의 작례(作例)로 보이며 도상학적(圖像學的)으로 매우 중요하다. 석각(石刻)의 각자(刻字)는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원효암 칠성각 [元曉庵七星閣]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원효암 경내에 있는 건물.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원효암 경내에 있는 의상대(義湘臺)로 미루어 의상(義湘)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나 창건 시기와 연혁은 확실하지 않다. 사기(寺基)에 따르면 1370년에 세워졌다고 하며 원효(元曉)와 의상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6·25전쟁 때 원효암은 소실되었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건물로 겹처마 팔각지붕이며, 원주기둥을 사용한 3량 구조의 익공집이다.

 

함안 군북 지석묘군 [咸安郡北支石墓群]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군.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27기로서 함안 지역 안에서는 가장 많다. 현재 원위치에 있는 것이 16기, 이전된 것이 10기, 매몰된 것이 1기로서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그 중 성혈(性穴)의 수가 모두 398개로서 성혈수가 가장 많은 26호 고인돌은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고 성혈과 성혈을 서로 연결하여 전체적인 모습이 천문도(天文圖)나 바위그림[岩刻畵]과 같은 느낌을 준다.

 

덕대리 고인돌은 동촌리 치바다들과 명관들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동촌리 고인돌군과 명관리 고인돌군의 연결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백이산(佰夷山:360m) 줄기가 북서쪽으로 이어진 곳에 있는 4호 고인돌 주변은 과거 고령토를 채취하던 곳인데 당시 돌검[石劍] 등 다수의 석기류와 붉은색 토기가 돌로 짠 여러 기의 관(棺)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4호 고인돌 주변에서 구릉지대 전체가 청동기시대의 돌덧널무덤 밀집지였던 것으로 파악되며, 덕대리 고분군은 6기가 지정되어 있으나 3호 고인돌은 소재가 불분명하다.

 

서산서원 [西山書院]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서원. 생육신인 이맹전, 조려, 원호, 김시습, 남효은, 성담수 등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1703년(숙종 29) 경상도 유학 곽원령 등이 창건하였으며, 1713년 나라에서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84년 지역 유림과 조려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사우, 강당, 원장, 문, 조려선생사적비, 생육신사적비 등을 갖추어 복원하였다. 해마다 음력 3월 1일과 9월 9일에 생육신의 충절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금계사(金溪祠)가 있는 부산면과 장흥의 설화

 

부산면 [夫山面] : 전라남도 장흥군 중북부에 있는 면에 위치

면적 38.00㎢, 인구 1,910명(2001)이다. 동쪽으로 장동면(長東面), 서쪽으로 유치면(有治面), 남쪽으로 장흥읍, 북쪽으로 장평면(長平面)·유치면에 접한다. 9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의 북부·동부·서부는 산지이고, 중앙부를 탐진강(耽津江)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면서 넓은 부산평야를 펼친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이고, 특산물로 마포(麻布)·표고버섯·유채 등이 있다. 교통은 강진·보성·영암 등으로 국도와 지방도가 연결되어 편리하다.

 

문화재로는 장흥 구룡리 마애여래좌상(長興九龍里磨崖如來坐像:전남유형문화재 193), 부춘정 원림(富春亭園林:전남기념물 67), 용호정 원림(龍湖亭圓林:전남기념물 68), 장흥 유양리(長興柳陽里) 고인돌군[支石墓群], 화수정(花樹亭), 영춘재(永春齋), 원모재(遠慕齋), 헌유사지(獻留寺址), 의마총(義馬塚), 금계사(金鷄祠), 의열사(義烈祠), 망군대(望君臺) 등이 있다.

 

 

 

갈대봉 이야기 : 천관산 상봉의 장흥 대덕 쪽에 있는 치마바위 옆에는 많은 바위들이 있었는데 이 바위 한 가운데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천관산 상봉이니 해발 700m 이상인데도 이 웅덩이 속에는 바닷가에 나는 갈대가 자라고 있었으며, 조개껍데기는 물론 해조류, 게 껍질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웅덩이의 물은 신기하게도 바다의 조류와 관계가 있어 바닷물이 썰물일 때는 이 물도 따라서 줄어들고 밀물이 되면 이 물은 다시 들어와 많아 졌다고 한다.

 

고동바위 : 용산면 운주리2구 봉황 마을의 앞에 부용산이 있는데 이 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고동 바위의 모양은 산꼭대기에 큰 혹이 툭 불거져 나온 것처럼 얹혀 있고 바위의 뒤쪽이 움푹 패여 고동처럼 생겼다. 옛날에는 이 바위에 산신령이 살았다고 하며 또는 신령스러운 고동이 살았다고도 한다. 이 신령이 든 큰 고동이 있어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거나 천재지변 또는 인간사에 이상이 생길 때는 황소울음처럼 큰 고동소리를 내서 마을 사람들에게 좋고 굿은 일을 알렸다고 하고 이 소리는 하도 커서 용산면 일대에까지 퍼졌다고 한다.

어느 해 이 근방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사전에 이 고동바위가 크게 울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주민들 중 고동바위의 우는 소리를 믿는 사람은 자리를 옮겨 재난을 피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홍수의 피해를 당했다. 이일이 있은 뒤로 이 바위의 우는 소리가 고동소리와 같다 하여 고동바위라 불렀다.

일제 말 종전 직전과 6.25사변 때에도 사이렌 소리 비슷한 고동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고동이 시달림을 반아 나가버렸기 때문에 울지 않는다고 하며 여름철에 가면 빨간 개구리를 볼 수도 있다 한다. 아마도 바위의 뒤쪽 움푹 팬 곳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공기가 진동하면서 소리가 날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며 개구리나 그외 다른 어떤 소리 내는 생물이 살고 있다가 기후의 변화에 따라 생리적인 작용으로 소리를 낳음직 하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어쨌든 자연과 인간과의 대화가 이뤄졌다는 증거이며 우리 인간은 이러한 자연과의 교호작용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고살바위 전설 : 대덕읍 신상리(新上里)에 있는 바위이름이다. 덕도(德島)가 무인도로 있다가 고(高), 정(丁),박(朴), 삼성(三姓)이 살게 되었는데 그 후 점차로 다른 성씨도 옮겨 살게 되었다.

점차 자손이 번성하였는데 유독 고 씨만은 자손이 늘지 않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고 씨는 한사람도 살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신상리 뒷산에 고살(高殺) 바위가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다고 하여 고 씨들은 이 동네에 살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성산 전설 : 대덕읍 신리(新里)에 뒷산이 있다. 이 산은 형상이 성인(聖人) 같고 준수하여 우러러 보이는 산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산을 신성하게 여겨 왔고 영험스런 산으로 대해 왔다.

이러한 연유로 주민들은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이곳에서 훌륭한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바다 건너 중국에서 한문을 수입해 온 뒤 산 밑에 모성래(慕聖來)라는 서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며 마음을 닦으며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이 날 것이라 하여 공성산(孔聖山)이라 불렀다 한다.

 

금수굴 이야기 : 관산읍 傍村에서 장천제를 지나 천관산으로 오르는 중턱에 조그마한 석굴이 있다. 이 굴은 입구가 작아 몸집이 작은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으나 들어서면 넓은 굴에 잔잔한 물이 흐르고 있다.

이 굴에서는 약수가 난다고 옛날부터 전국에서 병약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 굴의 물은 아침 열시경 부터 맑았던 물이 여러 곳에서 노란 물기둥이 솟구치기 시작하여 정오가 되면 물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정오가 지나면 황금빛 찬란했던 물이 다시 맑은 물이 되곤 했다.

또한 오후 두시가 되면 다시 황금빛으로 변했다가 오후 네 시가 지나면 다시 맑은 물로 되돌아가곤 했다.

이렇게 하루에 두 번씩 물이 황금빛으로 되는데 손으로 떠도 노랗고 그릇으로 떠도 노란 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시간을 맞추어 금물을 먹으로 갔다고 한다. 이곳에는 물을 떠먹는 금 그릇이 하나 있었는데 옛날 어느 날 한 젊은 여인이 그 그릇으로 물을 떠 마시고 나오다 금 그릇이 욕심이 나 감추어 들고 나오다가 큰 벼락을 맞아 죽고 말았는데 그 후부터는 그 물을 먹어도 약이 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기역산 전설 : 부산면 용반리 서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일명 기옥산 이라고 하는데 험준한 절벽을 이루어 경승이 아름다우며 바로 밑으로는 탐진강 상류가 흐르고 있어 명승지이다.

 

옛날에 힘세기로 유명한 장사가 있었는데 큰 바위를 두 손으로 치켜들고 이 기역산의 꼭대기에 있는 바위 위를 걸어갔다. 어찌나 거인이고 힘이 센데다가. 큰 바위까지 들고 걸어갔으니 바위 위에 발자국이 생겼다. 이 발자국의 흔적은 지급도 남아있다 한다. 이 장사가 돌을 들어다 놓아둔 것이 현재 제암산 꼭대기에 있는 암석이라고 하는 전설도 있다.

 

노승복에 얽힌 전설 : 관산읍 하발리 안산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옛적부터 노승봉이라 불러왔다.

옛날 왜구가 이곳에 침입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노승은 마을 사람들에게 빨리 안산으로 피하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설마 했으나 너무 간곡하고 급하게 말하는지라 안산으로 피했다. 안산에 올라가 보니 아니나 다르랴 왜구들이 벌떼처럼 쳐들어 왔다.

이를 본 노승은 혼자서 왜구들을 상대로 싸웠다. 신기한 힘을 가진 노승은 많은 왜구를 물리쳤으나 워낙 벌떼같이 달려드는지라 당해내지 못하고 전사했다. 주민들은 자기들 생명의 은인인 노승을 후하게 장례 지내고 노승의 덕을 기리기 위해 산 이름을 노승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왜구의 침략은 이 고을에도 심했던지라 왜구의 침략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게 많다.

 

독실포 전설 : 탐진강은 장흥읍 박림소를 거쳐 장흥읍 덕제리에 있는 독취정(獨醉亭)에서 잠시 머물다가 덕제리로 건너가는 다리 위의 보에 이르게 된다. 이 보의 이름이 독실보다.

옛날 이 근방에 사는 한 농부가 이 강가에 송아지를 매어 두었다가 석양에 송아지를 찾으러 가서 보니 온데 간데없었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소고삐만 물위에 떠 있었다. 놀라서 바라보니 굉장히 큰 메기가 송아지를 통째로 물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일이 있는 뒤로 송아지 독(獨) 잃은 실(失)자를 써서 독실보라고 불리어 졌다는 얘기다. 독실의 “실”은 실(失)자가 아니라 곡(谷)의 옛말이 “실”이다. 이 보 옆 둑에 있는 비석이 있는데 그 비석에도 곡(谷)자가 새겨져 있다.

이를 보면 돌(石―독)이 많은 골짜기(또는 마을)에 보(洑)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지 않나 추측되기도 한다.

 

돌 구시(돌구유) : 장동면 배산리를 지나 장평면으로 가는 왼쪽에 길가에 조그만 방죽[저수지]이 있는데 돌구시가 있다하여 구시방죽이라 불리고 있다.

이 방죽가에 있는 돌구시의 크기는 길이 3m, 나비1m, 깊이50cm 정도로 깎아 만든 돌로 된 구유이다.

옛날에 땅의 형세에 따라 말을 가지 못하게 하면 명당 이 많이 생길 것이니 말구시를 만들라는 이승도사의 말에 의하여 수원도승이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구시에 물이 마른 적이 없으며 마를 때가 되면 곧 비가 와서 가득 채워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곳에서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약사여래불상이 있어 절과 돌 구시와의 관계를 생각할 수도 있고, 구시의 생김새를 보면 인공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임란이나 아니면 외적의 침략 때 말을 배산 산성에서 훈련시키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말 궁구리 재 : 장동면 만년리 뒷산에 있는 재 이름인데 1600년경 고산 윤선도가 지어준 이름이라고도 한다

옛날 장흥에서 장평간 도로가 있기 전 이재는 장평으로 또는 광주로 가는 중요 통행로였다.

교통 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재였으나 커다란 바위가 많고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지금도 가파른 경사가 그대로 있어서 어른도 엎드려 기어가야만 넘고 내려가는 험악한 재이다.

어느 날 장흥골 원님이 장평을 가기 위해 말을 타고 거드름스럽게 넘어 가려했다. 이를 본 만년주민들이 한사코 말렸다. 재가 가파르고 길이 험하니 말에서 내려 걸어서 가든지 아니면 배산 으로 돌아서 가라고 몇 번이고 말렸으나 원님은 막무가내로 말을 타고 재를 넘기 시작했다. 몇 번을 말과 함께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원님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말과 함께 굴러 떨어진 원님은 며칠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 후 만년 사람들은 재의 꼭대기 부근에 원님과 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당산을 만들어 주었고 그 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당산에 돌을 하나씩 던져 원님과 말의 혼을 달래고 자신의 무사고를 빌었다.

아흔 아홉 골을 넘어 원님의 묘가 있었고 명절 때면 중이 와서 돈을 놓고 물도 떠놓고 갔다. 당산이 재위의 중간지점 두 곳에 있었다. 재의 이름도 이 사건에서 유래되어 몰(말―馬) 궁구리(궁글이)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말머름등 전설 : 용산면 하금리 뒷등에 있으며 지금은 “남은 골”로 불린다.

옛날 어떤 나그네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말이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형에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말이 갑자기 넘어져 죽고 말았다. 나그네는 어찌할 도리 없이 그곳을 파고 말과 함께 소지품의 일부를 묻었다. 그 뒤 이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가 말을 타고 갈 때의 행색으로나 말 등 위에 얹고 간 소지품이 귀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금마구(金馬具)를 파서 욕심에 채우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남이 보지 않도록 밤을 도와 몰래 그 마총(馬塚-말 무덤)에 가서 막 땅을 파려고 괭이를 내리찍었다. 그 때 갑자기 구름이 시커멓게 일어나고 비바람이 치면서 뇌성벽력이 일어났다. 겁을 먹은 동네 사람들은 허겁지겁 마을로 돌아왔다.

이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동네 사람들은 두려워서 말 무덤을 파기는커녕 그 옆을 지나가는 것도 피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욕심은 버려야 하는 것. 훌륭한 교훈이 아닌가!

 

망부 암과 병풍바위 : 유치면과 병영의 경계에 수인산(修仁山)이 있다. 이 수인산 봉우리는 남쪽으로 계속 뻗어 장흥읍의 옛 성터를 이루고, 일부는 남으로 뻗다가 다시 동쪽으로 휘어 꺾어 부산들은 한 눈에 내려다보게 되는데 이 산(수리봉이라고 함)을 등에 진 채 구룡(九龍), 내안(內安), 자미(子美) 등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자미 바로 뒤에 그 형상이 사람과 같이 생겼는데 억불산의 며느리 바위가 건너다보인다 해서 망부암(望婦岩)이라 부른다.

며느리인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산면이란 이름도 망부암(望婦岩,또는 夫岩)이 있는 산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얘기도 전한다. 그리고 자미 뒷산중턱에 병풍(倂風)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천애절벽의 바위가 있는데 병풍바위라 부른다. 이 병풍바위에는 원감국사(圓鑑國師)의 화상이 새겨져 있었다는데 지금은 비바람에 씻겨 알아보기 어렵다.

원감국사는 고승(高僧) 위충지(魏止)의 법명(法名)이라고도 한다.

 

벌고 개 터 : 용산면 어산리 1구 어동 동쪽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이 고개 아랫마을에는 확실하지 않은 모 성씨가 살고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 그들은 교만하여 마을일을 자기네들의 생각대로 처리하였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도사 한사람이 이 지방의 형국을 보니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성씨의 성격이 교만하여 장차 좋지 않은 일이 새겨 날 것 같으므로 이곳에서 며칠을 머무르면서 생각하던 끝에 도사는 그 마을의 나이 많은 노인을 만나서 말했다.

“어서(語西) 뒷산의 범 바위 머리를 벌 고개 쪽으로 향하도록 돌리고 서당(書堂)재와 구룡(龜龍) 고개를 자르시오.”그 노인은 동네 사람들과 의논한 끝에 범 바위를 돌리고 서당재와 구룡 재를 잘랐다.

그런 후로 그 마을이 폐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의 피가 한 달을 두고 흘러 지금도 그 흙이 핏빛으로 물들어 붉다고 한다. 그 도사가 말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한다.

이름아이콘 이서연
2009-04-15 20:31
오천내 춘향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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