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공도공종회
작성일 2007-01-08 (월)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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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권력보다 역사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65)은 시대 앞에 선 역사가로서 한국 지식인 사회와 기독교계에 대해 비판적 지성인의 소명을 다해 왔다.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65)은 시대 앞에 선 역사가로서 한국 지식인 사회와 기독교계에 대해 비판적 지성인의 소명을 다해 왔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사 연구자로서 한국사에서 기독교가 해 온 역할에 주목하며 한국사회의 지식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역사의 주체로서 부끄럼 없는 소임을 다할 것을 강조한다.

주일학교에서 민족의식 싹 틔워

6월 초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됐을 때 그가 맨 먼저 찾아가 인사를 드린 사람은 국사학계의 원로인 이기백 선생이었다. 이 위원장은 1963년 서울대 사학과 4학년 시절 이기백 선생의 ‘한국사신론’을 읽고 받았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온화하면서도 엄격하고 절제된 인품이 그의 사관과 문장에 그대로 배어 있었다”고 말한다.

이기백 선생은 수많은 사료를 섭렵하고 연구업적을 정리하는 객관적 연구방법으로 국사학계에 새로운 도약의 장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 관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밝혀냈던 것.

역사를 보는 거시적 시각을 깨우쳐 줬던 은사 김철준 선생(1923∼1989)과 역사 연구의 미시적 방법을 가르쳐 줬던 한우근 선생(1915∼1999)도 이 위원장이 국사학자가 되기까지 큰 가르침을 베풀어 준 스승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초중고교와 대학을 거쳐 합동신학교를 다니며 배운 것보다 더 값진 교육을 받았던 곳은 어린 시절의 주일학교였다. 그는 광복 직후인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녔다. 특히 당시 주일학교 교사였던 문성주 장로의 성경이야기는 그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줬다. 모세, 다윗, 삼손 등이 등장하는 문 장로의 구약성경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민족의 위협을 받으며 자기 민족을 어떻게 지켜냈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줬다. 이는 학생들에게 당시 우리 민족의 처지를 떠올리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어난 6·25전쟁 기간 중 그는 인민군 치하에서 약 한 달 반을 보냈다. 고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민족을 죽여야 하는 민족적 비극과 아픔을 느꼈다.

그가 역사학계에서 민족주의적이라고 평가를 받게 된 데는 이와 같은 오랜 연원이 있다. 그 자신은 “스스로를 민족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받은 교육과 겪어 온 경험을 통해 얻은 민족에 대한 깊은 의식이 잠재의식처럼 쌓여 있다”고 인정한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다녔던 교회는 신사참배 회개를 강력히 주장하고 신앙의 순수성과 생활의 절제를 유난히 강조하는 장로교 계열의 ‘고신파’였다. 이로 인해 그는 신앙적으로 고신파의 보수성을 따르지만 ‘남북나눔운동’에 참여하고 통일 대비 연구모임을 주도하는 등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려 애쓰는 한편 외국인 근로자들의 인권과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실천적 측면에서 진보적 입장을 취해 왔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민족의식과 6·25전쟁 중에 겪은 비극적 경험이 그를 실천적 진보성으로 이끈 동인이었다.

◆목사꿈 접고 한국사연구 방향 전환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고등학교 때 목사가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는 일단 대학 공부를 마친 뒤 신학교에 가기로 하고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서양사를 공부했으며 종교사,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의 강의를 들으며 신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대학 2년을 마치고 입대한 뒤 그가 겪었던 작은 사건이 삶의 방향을 한국사 쪽으로 틀게 만들었다. 당시 한 장교가 그에게 국사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한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 장교는 “서울대 사학과를 다니다 왔다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모른다니 말이 되느냐”며 심하게 모욕을 줬다. 이 위원장은 자신을 반성하며 서양의 목사가 아니라 ‘한국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위원장이 ‘6사단 공병대의 통역 장교였던 선 중위’라고 기억하는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국사학자 이만열’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는 제대 후 복학해 한국사 공부에 집중했다. 특히 고대사상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외래 사상이 들어와 우리 사상과 어떤 갈등과 습합(習合) 작용을 이루는지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중고교 교사로 근무하며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도 한국 고대 종교사를 계속 공부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그는 단재 신채호의 강렬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만났다. 단재는 단군 이래의 낭가사상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재야 사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김부식 이래로 내려오는 유가(儒家)들의 사서를 보며 재해석했다. 때로 무리가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 위원장은 “철저하게 현대 사학의 방법론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면서 펼치는 신채호의 고대사상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역사적 신념을 가지고 투쟁하며 민족주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단재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뒷날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해직시절 한국기독교사 연구 오늘까지 이어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온 국민이 통일의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때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발표했다. 독재의 장기화를 법제화하는 이 사태에 대해 한국 교회가 지지를 보내는 현실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공부한 역사학을 통해 기독교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그는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연구했고 1973년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이뤄지던 1905∼1910년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반봉건·항일민족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했는지 밝힌 것으로 기독교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보수적 신앙의 한국사 연구자였던 그는 이를 계기로 기독교 사회의 진보적 사람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유신과 군부세력에 대해 비판하던 그는 1980년 신군부세력이 집권하면서 교수로 재직하던 숙명여대에서 쫓겨났다. 다행히 그는 해직 중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한국기독교 100년사 집필을 위한 자료조사의 기회를 얻었다.

국내에 돌아와서 그는 이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1982년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당시까지 신학자들이 거의 독점했던 한국기독교사 연구에 역사학자들이 참여하게 됐다. 이 연구회는 1990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로 발전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기독교사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1982년부터 시작한 연구발표회는 현재 200회를 넘어섰다.

이 위원장은 한국근현대사 연구에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적잖이 남겼지만 자신의 주 전공분야는 한국기독교사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어린 시절 꿈이던 목사가 되는 대신 기독교사가로서 한국기독교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해직 시절의 경험을 통해 한국사든 한국기독교사든 역사 속에 중요한 가르침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부와 권력을 추구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역사에서 살아남는 것”이고, “민중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민중의 고통에 참여하면서 산 증인이 되는 자만이 역사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역사의 발전이란 역사의 주체가 되는 인간들을 확대시켜 가는 과정”이라는 그의 역사관을 토대로 한다. 역사의 발전이란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문제뿐 아니라 자기 사회의 문제를 주체자로서 해결해 가려는, 주체적 존재의 확대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자유화하고 사회적으로는 평등화하는 과정”이다. 그가 군사독재 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당당하게 역사가로서 비판적 지성인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관이 신념화됐기 때문이다.

그는 해직시절이던 1982년 10월부터 매일 저녁 원고지 약 20장에 달하는 ‘일기’를 쓰고 있다. 자기 삶의 역사가로서 이 시대를 기록하는 그의 이 ‘사사로운’ 역사 집필은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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