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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12-16 (목)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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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정(喚惺亭) (5)

–고고한, 임진란 팔공산 의병장 태암 이 주(李 輈)의 학문과 충의가 깃든 정자–

3.환성정 강학과 임진왜란

2) 임진왜란과 팔공산 창의(倡義)

대구지역 의병대장 낙재 서사원은 1592년(임진) 8월 29일 팔공산에 피난 중이던 조모께서 타계하였다.그는 승중손(承重孫)으로 주상(主喪)이 되어야 하였다.그래서 부득이 모당 손처눌이 의병대장을 승계하였다.향병은 각기 밭은 지역에서 전투를 하였는데9월 12일에 달지리장(達只里將) 서득겸(徐得謙)이 낙동강변의 아금암(牙琴巖)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이주(李輈)는 이 소식을 듣고종일 슬퍼하며 탄식하였다고 한다.이듬해 1593년 2월 19일에 손처눌이 또 부친상을 당하였으므로 이주(李輈)가 의병대장을 승계하게 되었다. 이때에 심정을 이주(李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낙재ㆍ모당 두 공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서공이 의병장이 된지 몇 달만에 조모상을 당하여 임무를 바꾸고, 손공은 함께 군무를 맡았다가 지금 또  상을 당하였다.내가 본래 재주가 없는데 홀로 여러 일을 거느리자니 󰡐사람은 가벼운데 책임은 부겁다󰡑는 탄식을 감당할 수 없다.”(태암집)

 

   위의 글에서 임진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과 이주(李輈)의 고뇌를 볼 수 있다.1595년(을미) 2월에 이주(李輈) 역시 모친상을 당함에 서재겸(徐再謙), 홍한(洪澣) 손처약(孫處約), 박충윤(朴忠胤), 최인(崔認), 최계(崔誡), 최동보(崔東輔), 채몽연(蔡夢硯), 채선수(蔡先修)등이 의병활동을 계승하게 되었다.

 

   팔공산은 임진왜란때 원근(遠近)의 제의장(諸義將)이 달려와 창의한 의병의 성지(聖地)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구지역 향병의 결성은 물론이고, 이듬해 1593년(계사)에는 86명의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 좌부(左部),우부(右部),전부(前部),후부(後部),동부(東部),남부(南部),유진지휘부(留陣指麾部)로 나뉘어 왜적과 전투를 하였다.(채선구의 『達西齋集』,『達西齋集草稿』)

1596년(병신) 9월 28일에는 의병장 95몀이 모여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이때에 대구의 죽계(竹契) 서재겸이 지은 시에 제의장(諸義將)이 화답한 시가 있다. 서재겸이 지은 원운(原韻)과 달서재 채선수의 차운(次韻)은 다음과 같다.(『죽계집』,『달서재집』)



세상의 난리에 임금께서 근심에 빠졌는데 어찌 한 몸을 보존하리오.

오히려 한 번 죽어 왜적 물리치는 것을 달게 여기리. 

모름지기 장사가 천검(天劍)에 의지하니

용렬한 선비 파진(灞津)을 건넜음이 우습도다. 

백행(百行:孝)의 좋은 풍습이 남아 충(忠)을 가히 숭상하니

삼한의 옛 강토에 천명(天命)이 새롭네. 영남 땅이 이로부터 많은 생색(生色) 날 것이니

다만 고명한 이름 후세에 남길 뿐만이 아니라네.(서재겸의 원운)

이 세상에 의(義)를 위해 목슴 바친 사람 많음을 아는데

제의장(諸義將)과 함께 화살과 돌로 미친 왜적의 티끌 쓸어버리리라. 

팔공산에서 군대가 쉬는 날 술잔을 들고

금호강 비개인 나루터에서 칼을 씻어리. 

요망한 무리 모름지기 속히 제거하고자

날카로운 기운 쌓으니 또한 마음이 새로운것 같네. 

맹세의 피를 미시는 것은 남아(男兒)의 할 일인데 

성대(聖代)의 많은 인재 이런 사람 길렀구려.(채선수의 차운)

  1597년(정유) 3월 22일에는 206명의 의병장이 이곳 팔골산에서 회맹을 하였으며(李應璧의『七松堂實記』).7월에는 화왕산성에서 집결하였고, 9월에는 32명의 의병장이 이곳 팔공산에 이르러 회맹 하였다. 이때에는 자신의 자(字)로써 연구(聯句)를 지은 시가 있다.(趙亨道의 『芝嶽實記』) 서사원은 이 회맹에 참여하여 “고원한것은 능히 행보(낙재의 字)가 행하리.(高遠能行甫)”라는 연구를 지었다. 그리고 동월(同月)에 팔조령을 거쳐 팔공산에 들어 닥친 왜적을 방어하고 달성(達成)으로 가서 적을 크게 격파 하였다.

   팔공산을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들은 1597년(정유) 12월에 울산의 서생포(西生浦) 도산성(島山城)으로 가서 퇴각하는 왜적과 싸웠다. 이때에는 서애 유성룡이 도체찰사로서 대구를 거처 경주에 도착하여 군대를 지휘하였다. 나의 선조로 대구 무태 입향조인 구회신(具懷愼:1564~1634)은 도체찰사의 군관(軍官)으로 명나라와 조선군이 연합하여 전투한 전황(戰況)을 보고하였는데 이 장계(狀啓)를 살펴보면 당시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잘알 수 있다

   “(前略) 명나라 군과 아군이 왜적의 내성(內城)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이 너무 견고하고 험하여 대포로도 격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적들이 성벽 위로 난 구멍을 통하여 조총을 많이 쏘아 명나라 군과 아군의 부상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징을 울려 공격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유격장군 진우문(陳愚聞)이 밤을 틈타 앞장서서 올라가 성을 공격하다가 오른쪽 대퇴부에 조총을 맞았습니다. 그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지난 밤에 가마를 타고 경주로 출발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위문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25일의 날씨는 역간 음산하였고 어제 미말(未末: 오후 3시경)에는 동풍이 계속 불고 빗발이 점점 거세었습니다. 군사들이 들판에서 노숙을 하고있는데 매우 걱정이 됩니다. 군량은 지금 계속해서 운반해 들이고 있습니다.”(『선조실록』,『징비록』)

   이 장계는 유성룡이 1597년 12월 25일에 경주에서 치계(馳啓:驛馬를 통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하였는데 9일이 지난 1598년(무술) 정월 4일레 한양에 도착하여 선조께 보고 되었다.동년 11월에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망하고 12월 11일에 왜적이 물러감으로 전란이 종결되었다.

   왜란이 종결된 후 1596년에 팔공산에서 회맹을 한 이운룡(李雲龍)이 1605년(선조 38년)에 통제사로 경남 고성의 수영(水營)에 부임하여 세병관(洗兵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귀빈과 동료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이때 이렴(李濂)은 다음과 같은 시(공산감구시(公山感舊時)를 지어 팔공산의 전투를 회고하고 있다.


“생각나누나 비바람[兵亂] 공산에서 휘몰아 쳤을 때/ 몇몇 영웅이 화살을 무릅 썼던고, 부자가 충성하기는 최씨(최동보,최여호)이고/ 형제가 충의를 다하기는 이씨(이계수, 이눌)를 따를수 없었네, 용(龍)이 뒤치고 고래가 바닷물을 뿜듯 그 위풍 장할시고 범[我軍]도 죽고 여우[倭賊]도 죽어 피로 물들었네, 서로 칼날 세워 싸웠던 때를 생각하며/ 때로는 북두성을 바라보고 홀로 서성이네,”(최동보『우락재실기』,『국역, 내가 격은 임진왜란』)

(다음호에 계속: bonwk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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