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인
작성일 2011-02-17 (목)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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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정(喚惺亭) (6)

-고고한 선비, 임진란 팔공상 의병장 태암 의주의 학문과 충의가 깃든 정자-

4. 환성정의 중건과 제유(諸儒)의 방문

1) 환성정의 중건

환성정은 태암 이주가 건립한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종전 후에 이주가 중건을 하여 강학하였는데 그가 타계한 후에 얼마간 유지되다가 다시 도괴(倒壞)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조에 발행(동왕 44년, 1768년으로 추정)된 『대구읍지(大丘邑誌)』의 「누정(樓亭)」편에는 환성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府:대구)의 북쪽 금호강 가에 있었다. 태암 이주가 건립하였다. 공은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두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였고,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세상에서 떠받드는 바가 되었으며, 문도(門徒)들에게 의리를 강명(講明)하였다. (중략) 사당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금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정자는 지금 허물어지고 없다.

위의 글은 환성정의 건립과 이주의 강학 그리고 그 유실된 과정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주의 현손인 만오당(晩悟堂) 이인제(1685~1761: 숙종11~ 영조37)는 ‘환성정 감음(喚惺亭感吟)’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옛터에 홀로 서니 돌만이 남아 있네.

선조의 유적을 생각하니 그 안타까움[恨] 차마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사모하는 마음에 지팡이를 끌며 유지(遺址)에 다다르니

들풀과 산꽃이 피어 홀로 옛터를 지키고 있네.

(古址巋然石有痕, 感先遺恨忍難言. 依依杖屨登臨地, 野草山花獨守存)

(『만오당집』)

위의 시에서 선조를 사모하여 선조가 지었던 정자의 유지(遺址)를 찾아와 노닐며 추원(追遠)하는 후손의 마음과 정자를 보존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함께 볼 수 있다. 이 시의 기구(起句)에는 ‘옛터에 홀로 서니 돌만이 남아 있네.’라고 하였고 결구(結句)에는 ‘들풀과 산꽃이 피어 홀로 옛터를 지키고 있네.’라고 하여 유지의 아름다운 경관과 쓸쓸함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이 시에서 환성정의 옛터에 ‘돌만이 남아있네.’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당시에 금호강의 지류가 이 환성정의 주변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인용문에 의하면 환성정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주의 타계 후 머지 않는 시기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오당 이인제의 생존 당시인 영조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영· 정도대에는 정자보다는 서원이 건립되어 제향과 강학의 장소로 자리 잡게 된다. 태암 이주의 후예 여기 1786(정조 10)에 서계서원(西溪書院)을 건립하였다. 서계서원이란 시내[溪]의 서[西]쪽 즉 무태의 서변에 지은 서원이란 의미이다. 당시에는 무태를 가로질러 남북으로 흐르는 동화천이 지금의 위치보다 서쪽인 서변의 중앙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원의 명칭이 서계(西溪)로 붙여졌다고 한다. 서계서원은 이주의 8대조로 조선 태종조에 대제학을 역임한 공도공 이문화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이주를 배향한 서원이다.

환성정은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계서원이 훼철되고 난 이후에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832년경(순조 32)에 발행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누정」편에 환성정이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 정자는 없다.[亭廢]’라고 하였고, 그 이전의 제가(諸家)의 문집에 정자의 명칭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무태지역 구씨의 두 정자인 서변의 송계당(松溪堂)이 1900년을 전후하여 편액되었고, 동변의 화수정(花樹亭)이 1901년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9~1912)이 개칭하여 편액한 것으로 볼 댸 (구연간의 『謹窩集』)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구씨의 두 정자가 편액된 연도는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의 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송계당은 1903년에 松溪齋라는 말이 처음으로 보임. 우성규의 『景齋集』)

환성정의 복원이 늦어진 이유는 조선 후기 서원의 발달과 관련이 있다. 조선 중기 임란을 전후한 16세기가 정자를 중심으로 학문이 이루어진 시기라면 17, 8세기 영·정조조는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이 발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대구지역의 예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임진란 전 임하 정사철의 강학소였던 아금정(牙琴亭)이 금암서원(琴巖書院)으로 바뀌었으며, 서사원의 강학소인 선사재(仙査齋)가 이강서원(伊江書院)으로, 손처눌의 강학소인 영모당(永慕堂)이 청호서원(靑湖書院)으로, 효자로 참봉인 서시립의 전귀당(全歸堂)이 백원서원(百源書院)으로 변경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환성정은 1902년(고종 39, 광무 6)에 이주의 9대손인 수헌(守軒) 이억상(李億祥)이 중수를 하였다. 이때에는 서원이 훼철되고 난 33년 후이다. 이당시에는 서원이 훼철되고 난 이후 남아 있던 건물을 중수하여 편액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정자는 모두 6칸이었고, 동쪽은 경의재(敬義齋), 서쪽은 체인재(體仁齋)로 편액하였다. 이억상은 「중수기」에서 환성정의 위용에 대해 “정자의 건물과 창(窓)이 비록 크고 아름답지는 아니하나 자못 호수와 산의 빼어난 경치와 나무와 숲의 아름다움이 있고, 또 100여 호(戶) 되는 자손들의 집이 좌우에 나열한 모양이 마치 여러 봉우리가 태산을 향해 두르고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아! 모든 우리 일족들이 여기에서 학업을 익히고, 여기에서 인륜을 베풀고, 여기에서 빈객을 접대하는 일로부터 선조를 받들고 후손들에게 법도를 끼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 정자에 의지하여 요체로 삼을 것인 즉, 오직 이 정자를 출입함에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일심으로 마음을 일깨워 우리 선조께서 경계하고 권면하신 뜻을 저버림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守軒集』)

조선후시에 이르러 환성정은 연재 송병선, 심석재, 송병순 형제와 면암 최익현 등 많은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 방문하여 교유하고 강학함으로 대구지역 최고의 정자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1971년에는 11세손 이순희(李淳熙)가 증축을 하였다. 19891년에는 서계서원의 옛터에 서원을 복원함으로써 서원과 정자가 한 경내에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옛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다음호에 게속)Bonwkoo@hanam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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