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인
작성일 2011-03-03 (목) 10:12
ㆍ추천: 0  ㆍ조회: 2150      
IP: 202.xxx.77
환성정(喚惺亭) (7)

-고고한 선비, 임진란 팔공상 의병장 태암 의주의 학문과 충의가 깃든 정자-

4. 환성정의 중건과 제유(諸儒)의 방문

2) 제유(諸儒)의 방문과 강학①

조선의 말기 19세기 후반으로부터 20세기를 전후하여 대구지역에서 거유(巨儒)로 활약한 이는 과재(果齋) 박해규(朴海奎:1823~1892),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1825~1905), 경재(景齋) 우성규(禹成圭: 1830~1905), 수헌(守軒) 이억상(李億祥:1835~1905),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1837~1902), 금우(芩愚)구연우(具然雨:1843~1914), 근와(謹窩) 구연간(具然侃: 1844~1916)등이다.

이들은 대체로 환성정이 중건된 이후에 이 정자에 올라 시를 읊고 때로는 강학을 하기도 하였다. 우성규는 월촌 [상인동] 사람으로 여러 고을의 현감과 군수를 역임하였고 1892년(고종 29년)에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都正)에 이르렀는데 이 정자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환성정이 비단같이 맑은 강 위에 있으니

인천이씨 일문(一門)의 정자로 그 모습이 선명하네.

공도공(恭度公)의 옛 음덕을 이어 받은

태암(苔巖)의 후예로 고명한 인재가 많다네.

향해(鄕解)와 한성시에 합격하여 선대를 잇고

춘하추동 시례(詩禮)를 강학하여 후손의 길을 열었네.

오늘 산행 길에 첫 번째로 방문하여

높은 정자에 오르니 여기가 삼청(三淸)인가 의심하네.

喚惺亭 挹 錦江平,

仁李派分也白明.

恭度家中遺舊蔭,

苔巖門下仰高名.

國庠鄕解承前榜,

春禮冬詩啓後程.

此日山行初入處,

高居疑l是近三淸.(『경재집』)

위의 시는 환성정이 비단같이 맑은 강, 즉 금호강의 북쪽에 있는데 인천이씨 문중의 공도공 이문화와 태암공 이주의 후예들이 건립한 정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이 환성정은 춘하추동, 즉 1년 사시(四時) 경서(經書)를 강학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이라는 것과 그 경관을 선경(仙境)인 삼청(三淸:신선이 사는 곳)에 비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성규는 위의 시에서 환선정은 인천이씨의 일문(一門中)의 중심이며 대표적인 정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지는 사람으로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1839~1912), 시암(詩庵) 이직현(李直鉉:1850~1928)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 인물의 선정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망국을 전후하여 일제에 항거하고,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을 한 기준으로 말할 때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분을 우리나라 최고의 반열에 있었던 분이라고 하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네 분이 모두 우리 대구지역을 방문하여 당시의 인사들을 만나고 강학도 하였는데 환성정 역시 그 중요한 중심지의 하나였다.

면암 최익현은 1900년(경자)에 이곳 환성정을 방문하였는데 그는 이해 4월에 충청도 정산으로 집을 옮기고 5월에 자신의 관향인 경주를 방문하게 된다. 그는 죽령을 넘어 경상도 지역으로 들어와 영주를 거쳐 안동의 도산서원과 퇴계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신령을 거쳐 경주에 도착하여 이곳의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양좌동(양동)과 옥산서원에 들러 화재선생의 사당을 배알하고 대구에 도착하였다.(『면암집』「연보」)

면암은 대구에서 경주최씨의 봉무정(鳳舞亭)을 방문하고 무태에 이르러 능성구씨의 화수정(花樹亭)과 이곳 환성정을 방문하였다. 그는 환성정에서 이억상 등을 만나고 일신정(日新亭: 이억상의 정자)에 들러 하루를 묵고 그 다음 날 산격의 용담재(龍潭齋: 書塾)에서 서찬규를 만나고 정산으로 돌아갔다. (『임재집』) 면암은 환성정차운[喚惺亭次韻]을 남겼는데 면암의 차운은 제영(題詠)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억상이 면암을 보내면서 지은 ‘일신정에서 최면암을 공경히 보내면서[日新亭奉贐崔勉菴]’라는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높으신 몸이 수레를 타고 빙 돌아서 초라한 나의 집을 방문하였네.

하루 밤 대화에서 10년 동안 읽은 책을 다 말하였네.

오늘 아침 저주(櫧州)로 이별하니 참으로 한스러워만난 정회(情懷)를 생각하

쓸쓸하여 마음이 너무나도 허전하네.

環逝高轍訪窮廬,

一夜話勝載書.

今朝最恨櫧州別,

招悵情懷復惄如(『수헌집』)

위의 시에서 이억상은 면암과의 이별을 너무나도 아쉬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03년(계묘)에는 연재 송병선이 대구를 방문하여 이곳 환성정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 정자에서는 제생(諸生)들이 『대학(大學)』을 공부하고 있었다.

연재는 『대학』의 8조목(條目) 중 격물(格物)의 격자(格字)는 도자(到字)의 뜻이라고 하고, 물격(物格)의 격자(格字)는 진자(盡字)의 의미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사물에 이르러 이치를 궁구하여 앎에 이른다’는 의미이고 물격치지(物格知至)는 ‘사물의 이치를 다 궁구한 연후에 앎에 이른다’는 의미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제생들에게 ‘8조목 중 가장 긴요한 것이 어느 것인가?’를 물었는데 제생이 ‘수신(修身)’이 근본이 될 것 같다고 대답하니 연재는 ‘성의(誠意)’가 가장 긴요한 것이라고 하고 성의는 사람의 귀관(鬼關: 생사의 갈림길, 즉 가장 중요한 곳)이니 관문(關門)을 터득한 연후에야 수신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8조목은 『대학』의 경(經) 1장에 나오는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이다.(『경제집』)

연재가 대구에 이르러 순행한 주요 장소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연재는 3월 18일에 묘골(동)에 이르러 태고정(太古亭)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이때 서찬규와 우성규가 이곳으로 와서 연재를 만났다. 19일에는 유호재(酉湖齋: 박해규의 齋閣)에서 『대학』의 ‘명덕장(明德章)’을 강론하고 영벽정(映碧亭)으로 이동하였다. 20일에는 임연당(臨淵堂)과 열락당(悅樂堂), 귀암재(龜巖齋)를, 21일에는 수성지역을, 22일에는 고산을 방문하였다. 23일에는 봉무정(鳳舞亭)에 도착하여 파계사에서 유숙을 하고 24일에 무태에 이르러 먼저 화수정(花樹亭)을 방문하였다. 일행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환성정으로 이동하여 『대학』을 강학하고 25일에 일신정에 들렀다가 만촌의 독무암(獨茂巖) 등을 방문하고 정산으로 돌아갔다.


 다음호에 계속

  0
3500
60 인천의 유래 운영 2018-04-12 1069
59 시호(諡號)문자의 정의 관리자 2016-11-21 1296
58 지오 이경희선생의 민족독립운동 [1] 서 봉 2016-09-13 3283
57 34세 이재욱 선생의 민요발표회를 보고 종회 2011-11-15 2032
56 東學農民革命 과 李芳彦 將軍 2011-10-07 1334
55 환성정(喚惺亭) (10) [2] 관리인 2011-05-25 2429
54 환성정(喚惺亭) (9) 관리인 2011-05-24 2112
53 환성정(喚惺亭) (8) 관리인 2011-04-18 2191
52 환성정(喚惺亭) (7) 관리인 2011-03-03 2150
51 환성정(喚惺亭) (6) 관리인 2011-02-17 2094
50 환성정(喚惺亭) (5) 관리자 2010-12-16 2254
49 환성정(喚惺亭) (4) 공도공종회 2010-10-28 2378
48 환성정(喚惺亭) (3) 공도공종회 2010-10-01 2113
47 환성정(喚惺亭) (2) 종회 2010-08-28 2044
46 환성정(喚惺亭) (1) 종회 2010-08-28 2416
45 보학 기초용어 운영인 2010-02-02 1971
44 중국 옥룡 설산 여행기 관리인 2008-12-29 2422
43 말의 법도와 질서 관리인 2008-12-29 1859
42 공도공의 스승 무송 윤택 관리인 2008-11-18 2774
41 32世 담헌(淡軒) 이성우(李盛雨) 관리인 2008-08-25 2460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