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서 봉
작성일 2016-09-13 (화)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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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 이경희선생의 민족독립운동

지오 이경희의 생애와 민족독립운동

                                     김일수


이경희(1880.6.11.~1949.12.4. 호 池吾)는 대구 무태 출신으로 서울의 기호중학 입학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즈음 교남교육회,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연관된 달성친목회와 사립 협성학교, 대동청년단,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등 다양하고 역동적인 계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 대구지회, 달성친목회 등은 실력양성론적 계몽운동과 가까웠고, 대동청년단과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등은 독립전쟁론에 근접해 있었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경희의 운동론은 실력양성론에서 독립전쟁론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였다.

 3•1운동 이후 이경희는 군내에서 조선노동공제회, 단연동맹회 등의 운동을 거쳐 1927년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전개된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자운데 조선경제연구회의 결성, 중외일보 회생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양자의 구성 인물들은 전자는 우익 성향이 강한 반면 후자는 민족주의 좌파의 성향이 강했다. 이처럼 이경희는 좌우를 포함하는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곧 이경희의 운동 노선은 실력약성론적 입장과 비타협적 운동 노선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 이경희의 정치적 성향은 해방 후 미군정기 국가건설 과정에서 한민당 계열과 함께 활동하는가 하면 미군정과도 협조적인 관계를 맺어 대구부윤과 경상북도 부지사로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성향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함께 한 민족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이러한 정치적 성향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대구부윤을 스스로 사임한다거나 한민당과의 관계도 강하지 않았다.


Ⅰ. 머리말 - 출생과 성장


 한국의 근대는 서세동점의 국제정세에서 안으로는 반봉건, 밖으로는 반외세를 극복하며 근대를 이루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반봉건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독립과 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략과 실천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지배와 저항의 이중구조 속에 처한 우리 민족의 현실은 한 개인의 삶과도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이 글에서는 한말• 일제강점기를 산 이경희의 생애에서 자신과 무관할 수 없었던 민족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경희 1908년 기호중학 입학을 시작으로 하여 1949년 12월 사망 때까지 국권회복운동과 민족운동 그리고 해방 후 국가건설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계몽운동, 무장투쟁에 기반을 둔 독립전쟁론, 민족협동전선 형태의 신간회 운동 등 다양한 활동 행보를 보여 주었다. 또 활동 지역도 대구, 서울, 만주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폭넓은 공간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이경희는 한국 근대 역사인물로써 충분히 연구대상이 될 만한 인물이다.

 이 글은 이경희에 관한 최초의 연구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신문자료와 잡지, 일제 관헌 기록과 미군정기 관련 기록, 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활용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경희의 출생과 성장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한말 국권회복운동,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 해방이후 국가 건설 참여 등을 차례로 구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이경희의 생애와 독립운동 그리고 국가건설 참여를 규명할 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 역사상 정립에 기여할 것이다.

 이경희李慶熙(1880.6.11.~1949.12.4.)는 1880년 6월 11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아버지 병두柄斗와 어머니 경주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이고, 자는 군선君善, 호는 지오池吾이다. 조선의 증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공도공恭度公 이문화李文和의 19대손이자 임진왜란 공신 태암공苔巖公 이 주李 輈의 11대 손이다.

 이경희는 대구 서씨 상조相祚의 딸(1881.~1909.8.21.)과 혼인하여 1897년 재화在華, 1900년 재태在泰를 낳았다. 그러나 부인 서씨가 1909년 8월 28살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였다. 이때는 그가 기호학교에 재학 중일 때였다. 첫째 부인에서 난 두 아들은 외가에 맡겨져 자랐다. 그 뒤 이경희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홍세洪世의 딸(1986.12.2.~1979.3.1.)과 재혼하였다. 그녀의 집안은 함경남도 단천丹川이며, 그녀의 오빠 조훈趙薰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이다.1) 두 사람 사이 1916년에 인원仁媛, 1922년에 재춘在春, 1926년에 신원信媛, 1929년에 재우在雨, 1934년에 단원丹媛을 낳았다. 이 가운데 맏딸 인원은 1915년 ‘대구권총사건’의 핵심 인물인 정운일鄭雲馹의 3남 인택仁澤과 결혼하였다.2) 정원일은 1910년대 재건달성친목회, 광복회 등에 관계하다 1915년 ‘대구권총사건’을 일으키고, 해방후 미군정 경북 관선 도 고문을 지냈으며, 1949년 반민특위 경북조사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3) 이처럼 이경희는 독립운동가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유족에 따르면 이경희의 아버지 병두柄斗의 직업은 한약업에 종사하였고, 집안의 경제도 중산층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병두는 1908년 대한협회대구지회의 찬으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협회대구지회는 1908년 1월 달본소학교達本小學校에서 임시회를 거쳐 발기회를 통해 설립된 계몽운동단체였다.4) 1908년 10월 2일 통상평의회에서 지난 9월에 열림 총회에서 논의도니 찬의원을 새로 구성하였다. 이때 찬의장은 이교섭李敎燮, 찬의부장은 서흥균徐興均, 찬의원으로 이병두를 포함하여 현경운玄擎運, 최시영崔時榮, 이현찬李鉉贊, 최만달崔萬達, 李浣根, 최무림崔茂林, 이영숙李英淑, 정래욱鄭來郁, 이종락李鍾洛, 지도일池道一 등이 선출되었다.5) 이처럼 이병두는 대한협회대구지회에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유족에 따르면 이경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95년 고향에서 소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당시 공산에는 학교가 설립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기에 추후 확인이 필요하다. 그는 서울의 기호학교畿湖學校를 다닌 것으로 확인된다. 그가 기호학교에 입학하게 되는 계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그가 대구보다는 서울을 선택했고, 영남인사가 중심이 된 교남교육회의 학교 설립이 현실화되지 않자 기호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기호학교는 1908년 6월 20일 기호흥학회機湖興學會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기호흥학회는 기호지방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08년 1월 19일 서대문밖 천연정天然亭에 있는 보성소학교 내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설립된 계몽운동 단체였다. 기호흥학회는 1908년 5월 20일 본회 총무 정영택의 학교설립의안을 받아들여 동년 6월 1일 특별총회를 총해 학교를 설립하기로 하였다.6) 학교 위치는 한성 북부 소격동에 위치한 기호흥학회 회관이었다. 설립 취지는 지방의 교육이 교사의 부족으로 인해 발전하지 못함으로 교사를 약성하기 위하여 사범학과에 중등학과를 운용하는데 있었다. 교과 내용은 수신修身, 교육, 학교관리법學校管理法, 지문地文 및 지지地誌, 역사 물리, 화학, 박물博物, 산술算術, 어학語學, 경제, 법학, 농학대요農學大要, 도화圖畵, 음악, 체조 등이었다. 기호학교는 학교 내에 본과와 특별과 등 두 개의 과를 설치하고, 수학기간은 중등교육 과정의 본과 3년, 사범교육과정의 특별과 1년 반으로 운영하였다. 특별과는 1909년 12월 1일에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고, 1910년 1월 10일에 폐지되었다. 그에따라 기호학교에는 중등교육과정의 본과만 남게 되었다.

 이경희는 1908년 기호학교의 중등교육과정인 본과에 입학하여 우등상을 수상하고,7) 1909년 2학년으로 진급하여 동년 7월 여름 방학실에서 우등상을 수상하였다.8) 이처럼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이경희는 기호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수학하였고, 이를 통해 국권을 상실하며 전락하던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전망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튼 그에게 있어 기호학교의 수학은 이후 그의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Ⅱ. 계몽운동과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활동


 이경희는 기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9) 먼저,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교남교육회는 1908년 3월 서울의 보광학교寶光學校에서 발기인 145명이 모인 가운데 총회를 통해 창립되었다.10) 교남교육회는 경북의 부호 장길상張吉相의 집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교육으로써 변화해가는 세계에 대처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교남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지방에는 지회와 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이 가운데 교남교육외는 회보로 『교남교육회 월보』를 발행하고,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교남교육회 교육부를 통해 학교 설립과 유지를 지도하였다.

 교남교욱회 회원 가운데 이경희의 친분과 관련해 이원식李元植(안동), 서상일徐相日(대구), 남형우南亨祐(고령), 김사용金思容(안동), 박중화朴中華(경주), 안제희 등이 주목된다. 이원식은 안동 출신으로 이동하李東廈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느데, 1904년 충의사忠義社, 1905년 서울 보광학교 입학, 서울 계산학교桂山學校 교사를 거쳐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그 사이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여 초대 임원으로 간사원을 지냈다. 또 남형우와 대동청년단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박중화와는 대동청년단과 청년학우회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이처럼 이경희의 교남교육회 활동은 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후 자신의 활동과 관련한 인맥 형성에 중요한 자양분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1908년 9월에 대구에서 결성된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달성친목회는 1908년 9월 5일에 李根雨와 김용선金容璇 등이 주축이 되어 청년층의 친목도모와 교육• 실업의 장려를 목표로 결성되었다. 당시 두 사람은 대한협회대구지회 회원이었다. 계몽운동의 핵심인 교육과 실업 장려를 동시에 표방한 두 단체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곧 달성친목회는 대한협회대구지회를 비롯한 대구지역 계몽운동의 청년조직으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일제는 달성친목회가 “대한협회와 행동을 같이 하고 비밀리에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11)

 달성친목회는 청년층 중심의 계몽운동을 지향하였고, 신지식인이 대거 참여하면서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달성친목회는 영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교남교육회12)와도 연대하고 있었다. 달성친목회는 교남교육회로부터 “교육과 친목이 그 이름은 다르나 장려하는 것은 같다”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13) 1909년 달성친목회의 제1회 창립기념식에 교남교육회의 남형우와 이원식이 교육시찰위원으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남형우는 「교육과 오인吾人의 생명」이란 주제로 연설을 행하였다.

 달성친목회는 신지식을 갖춘 청년층의 단체이었기에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먼저, 달성친목회 회관에 법률야학강습소를 설치하고, 보성법률학교의 강의록을 교재로 하여 근대 법률을 강의하였다.14) 법률야학강습소는 일반인본다는 지식층•자산가를 대상으로 하여 근대사회의 법률체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 협성학교 내에 계절학교 형태의 하기강습소[소장 서기수]를 설치하여, 영남지역 각 군의 학생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하여 역사와 이화학理化學을 가르쳤다.15) 또한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는 설립 1년 만에 학생이 5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교실이 비좁아 불편해지자 달성친목회 회관을 빌려줌으로써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16) 이처럼 달성친목회는 교육운동을 중점적으로 벌인 계몽운동 단체의 성격을 지녔다.17)


 셋째, 대구에 소재한 사립 협성학교의 교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협성학교는 1907년 11월경 경북관찰사 이충구李忠求의 노력으로 북문 안에 건물을 신축하여 개교하였다.18) 협성이란 말은 협성학교 취지서 중 협심동력協心同力에 성립양규成立良規하야의 머리글자에서 찾을 수 있다. 협성학교의 설립 목적은 협심동력協心同力成立良規ᄒᆞ야 유지방침維持方針을 확장擴張ᄒᆞ고 교육과정敎育課程을 찬조贊助ᄒᆞ와 창신개도倡明開導에 가혜후학嘉惠後學ᄒᆞ야 면부勉副 석시昔時 낙육지본의樂育之本意와 금일 협성지신의協成之新義케 ᄒᆞ심을 만심희망滿心希望하는 것에 있었다.19) 


 협성학교는 사립 중등학교로서, 낙육재樂育齋와 양사재養士齋의 소유재산을 기본으로 하여 재원을 마련하면서도 신축 교사 비용과 운영에 드는 소요 예산은 지역 유지의 협조를 받았다. 협성학교는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학교 임원 선정 및 운영에 관해 상호 협의하였다. 이에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서상하가 협성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20) 협성학교의 교사는 일본인 1명, 한국인 3명 등 4명이고, 학생은 108명으로 모두 남학생이었다.21) 시기는 다르지만 이경희는 협성학교의 안확, 윤세복, 홍주일 등과도 협성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22)

 사립 협성학교의 교육 확장에 대해 친일 성향의 경북관찰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은 방해에 나섰다. 협성학교가 고등학교 과정을 설치하려 하자 박중양이 협성학교를 제2공립보통학교로 전화시키려 하였다.23) 또한 박중양은 협성학교의 확장을 방해하기 위해 협성학교의 재정 장부를 압수하여 조사하는 방법으로 탄압을 가했다. 이에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사태를 조정하기 위해 회장 서봉기의 지시로 이일우• 김종석• 김영수 등 3명을 총대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동 지회는 총대위원 이일우의 조사를 보고 받고, 박중양의 태도에 유감을 표명하였다. 이때 교남교육회에서도 강하형姜夏馨을 대구에 파견하여 협성학교 사태를 조사하였다.24) 이처럼 이경희가 관계한 교남교육회와 사림 협성학교는 서로 관련되었다.

 넷째,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 무렵 안희제, 서상일, 남형우, 이원식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대동청년단원 윤병호에 따르면 대동청년단은 단장 남형우, 부단장 안희제를 비롯하여 이경희, 서상일, 장건장, 윤상태, 박중화, 최윤동, 김관제, 김동삼, 신채호, 신상태 등을 구성원으로 하고 있었다.25) 이들 가운데 안희제, 윤병호, 남형우, 서상일 등은 백산상회의 주주였다.26) 대동청년단은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상해 임시정부 등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군자금 모금과 인재육성, 국내외 민족운동 세력과의 연락을 목적으로 활동한 비밀결사였다.27)

다섯째, 이경희는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新民會 중앙본부가 1909년 8월 창립한 청년운동단체이다. 신민회가 청년운동단체를 결성하게 된 배경은 청년층이 국권회복운동의 핵심세력이 되어야 하며, 동시에 청년층이 장래 나라와 겨레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청년학우외의 창립발기인은 윤치호, 장응진, 최남선, 최광옥, 차리석, 안태국, 채필근蔡弼近, 이승훈李昇薰, 이동녕李東寧, 김도희金道喜, 박중화朴中華, 전덕기全德基 등 12명이었다. 또 『소년』에 보고된 「청년학우회보」에 의하면 청년학우회에서 활동한 사람은 대략 6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28) 이 가운데 박중화는 발기 당시 보성중학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윤치호를 대신해 회장 대행을 맡는가 하면 한성연회 경법과 과장으로 활동했다. 박중화는 교남교육회, 대동청년단 등에 참여한 인물로서 이경희의 활동과도 겹쳤다.

  청년학우회는 「청년학우회설립위원회의정건(적요)」에서 “본회는 대한의 무실務實•역핵力行으로 생명을 작作하난 청년학우를 단합하야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며 아울러 지智•덕德•체體 삼육三育을 연구코 또 그 호미好美한 자를 천이踐履하야 건전한 인물을 작성하기로 목적”한다는 뜻을 밝혔다.29) 곧 청년학우회는 지•덕•체 삼육 함양과 인물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지방에 연회를 두기로 하고 한성연회를 가장 먼저 결성하였다. 청년학우회 한성연회는 1909년 11월 설립청원서를 제출한 이래 1910년 3월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한성연회의 활동은 매달 정기총회와 의사회, 강연회, 음악회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30) 한성연회의 주요 임원은 회장에 조병학, 부회장에 노기승, 총무원에 이동녕, 의사원에 김인식 등이었다.31) 여기에 이경희는 백영은白永殷, 장도순張道淳(뒤에 任斗鎬로 변경) 등과 함께 한성연회의 검찰원으로 활동하였다. 이경희가 관련된 단체 활동에서 간부를 맡은 것은 청년학우회 한성연회가 유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만큼 이경희의 활동에서 청년학우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청년학우회의 이회영, 이동녕, 이규봉 등과 한성연회의 장도순 등이 병합 이후 서간도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 서립을 주도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경희도 그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했다는 설도 있다.32)

 1910년 8월 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후 청년학운회는 강제해산 당하였다. 그 뒤 이경희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때 그의 행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관련해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가 관계한 인맥으로 보면, 만주 망명은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족들은 만주 심양에서 달신학교達新學校의 교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 달신학교는 두만강 대안 지방에 있었다. 김중오가 달신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고, 학생의 나이는 9세부터 17세까지 분포되었으며, 학생은 29명 정도였다. 교과목은 지지, 역사, 국어, 한문, 작문, 이과, 수신, 산술, 창가, 체조, 습자 등이었다.33) 그러나 이경희가 달신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두만강 대안 지방(십팔도구 내신개)에 있는 창신학교昌新學校의 교사에 이경희가 나타난다. 중간 이름이 경慶이 아니라 경京일 수도 있다.34) 동명이인일수도 있으나 이경희와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달신학교와 창신학교에 관해서는 앞으로 규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의 유적은 이경희가 무송현撫松縣에서 둔전을 개발하여 군자금을 조성하고 청장년을 훈련시켜 독립운동 전선에 내보낼 계획을 추진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해서도 이경희의 대동청년단,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등의 활동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다만,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1915년에서 1916년 사이 이동휘, 이종호, 장기영 등이 중국 왕청현 나자구羅子溝 한인촌에 독립군 사관 양성학교로 세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에 학도로 생활했을 가능성도 있다.35) 이 학교는 중국 당국이 한인의 민족교육을 중국 체제에서 운용하려고 반포한 「획일간민교육변법劃一墾民敎育辨法」에 따라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학교에 학도 명단에 이경희의 이름이 나타난다.36)


Ⅲ. 1920년대 전반기 활동과 의열 투쟁


 3•1운동 이후 이경희는 기호학교에 다닐 때 살았던 서울의 안국동에서 거주하였다. 서울에 거주하면서 1920년 4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조선 노동자의 지식계발과 인격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37) 한국에서 근대적 노농운동을 전개한 최초 단체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가졌다.

 그는 1921년 3월 13일에 개최된 조선노동공제회 중앙조직의 예비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경성본회 대표자 61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중앙 경성 본회 구성원 중 정운해(대구), 조태연(상주), 조성돈(상주), 이여성(칠곡)등이 경북 출신이었다.38) 또한 그는 조선노동공제회의 의사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2만 5천원의 자금으로 소비조합을 발기하고 4월 2일 총회에서 결의 확정할 계획이었다.39) 7월 15일 서울 관수동에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이 개업하였다. 주요 구성원은 이사장 유앙호, 전무이사 이수영, 이사 임일근, 성홍석, 서계원 등이었고, 이경희는 이사로 활동하였다. 소비조합은 처음에는 미곡만 판매하고 있었고, 추후에는 모든 일용물품을 취급할 계획이었다.40) 이처럼 이경희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소비조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2월 이경희는 이원식, 윤명은, 오상근, 문일평 등 20명의 발기로 단연동맹회를 결성하였다. 사무소는 서울 인사동에 소재한 新光社에 두었다. 단연동맹회의 취지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영靈을 위하여 육肉을 위하여 연烟을 단하노라. 인격적 경제를 위하여 연을 단하며 생존의 결함을 돕기 위하여 연을 단하노라. 다시 만심의 심울心鬱을 연화烟化하기 위하여 일선의 동정을 촌진寸進하기 위하여 그리하야 연을 단하노라. 연을 단하는 일의 자체야 그 이 이상이 그리 심원하며 실행이 그리 위대하랴만은 그 주위에 미는 감파感波, 또 그 결정의 과실은 크다 하노라. …(중략)…연을 단함은 지미한 일이다. 그러나 차로 由 하야 스스로 빈자의 교육을 사랑한다하면 이 일이 또한 크지 아니 하랴. 우리의 연烟을 단斷하는 眞意는 글의 다소多少에 있지 아니하리라. 래來하라 진進하라 단연동맹회에…”41)


또한 단연동맹회를 결성하게 된 배경을 발기인에게서 다음과 같이 찾을 수 있다.42)


 “우리의 단연한다하는 일이 그다지 큰일은 물론 아니오. 그러나 정신상으로 나 육체상으로나 아무 유익을 없고 비록 사소하다 할지라도 소용없는 돈을 쓰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 이에 우리는 모든 방면으로 생활을 개선하는 동시에 먼저 사소하나마 담배를 끊는다 하는 것은 그 실행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큰일인 줄로 생각하고 그리고 사소한 돈이라 할지라도 담배 먹는 돈을 모아서 혹은 학생에게나 혹은 기타 방면에 유리하게 쓰려고 생각하오.”


 이처럼 단연동맹회는 담배를 끊는 것이 일제강점기 민족모순 해결에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금연이 생활 개선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절약해서 모은 돈으로 장학금이나 사회 여러 방면에 사용되길 희망하는 차원에서 결성되었다. 이러한 단연 운동은 1907년 단연을 통해 국채를 갚아 국권을 유지하자는 경제적 계몽운동 차원의 국채보상운동의 경험 위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그리고 단연운동은 1923년 조선물려장려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테면 1922년 12월 김제 단연동맹회, 1923년 1월 은율 단연동맹회와 숙천 금주단연동맹회, 1923년 2월 군산 단연동맹회와 진주 여자단연동맹회, 평택 봉남리 단연동맹회, 1923년 3월 옥천 단연동맹회, 과천 단연동맹회, 용종지 금주단연동맹회, 성천 삼흥면 금주단연동맹회, 함평 금주단연동맹회, 보성 금주단연동맹회, 1923년 4월 영변 금주단연동맹회, 1923년 5월 강계 금주단연동맹회 등의 활동이 전개되었다.43)

 이경희는 1920년대 전반기 사회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의열단의 투쟁과 연관된 제2차 암살파괴계획(1923.3, 일명 ‘황옥사건’)에 연루되었다. 이것은 의열단이 러시아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아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1922년 하반기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경성전기회사, 주요 간선철도 등의 기관 및 시설물과 촉독· 정무총감· 경무국장 등 총독부 주요 요인을 겨냥한 대규모 암삼폭파 거사를 추진하였다.44) 이 계획의 중심에는 경북 안동의 김시현이 있었다. 여기에 현직 경부 출신의 경찰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점이 다른 의열투쟁과 다른 점이었다.

 이경희는 1923년 3월 15일 황옥 경부의 집에서 「조선혁명선언서」 1책, 「조선총독부 소속 각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문서 100장을 전달받았다. 그 가운데 그는 황옥으로부터 문서를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우송하고, 나머지는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에 뿌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쾌히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이경희는 부탁받은 문서를 서울에서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우송하였다.

 1923년 3월 오종섭의 밀고로 시작된 검거 선풍에서 일제 경찰은 관련자 25명 중 18명을 체포하고, 폭탄과 총기류 모두 찾아내 압수하였다. 이 사건은 경기도경찰부, 평안북도경찰부, 신의주경찰서 등 3곳의 경찰 기관의 수사에서 그 규모가 밝혀졌다. 먼저, 1923년 3월 14일 평북경찰서 및 신의주경찰서는 안동경찰서와 협력하여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 외 5명의 관계자를 검거했다. 동시에 파괴용· 방화용· 암상용 3종류의 폭탄 18개,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소속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의열단 문서 6백 부를 압수하였다. 경기도경찰부는 1923년 3월 15일부터 관련자 12명을 검거하고, 경성시내에서 각종 폭탄 18개, 폭탄장치용 시계 6개, 뇌관 6개, 권총 5정과 「조선혁명선언」 및 「조선총독부소속 관공리에게」라는 제목의 의열단 문서를 압수하였다. 그 뒤 경찰기관은 3월 말 무렵 조사를 마치고 관련자들을 검찰에 송치하였다. 사건 관계자 12명은 1924년 8월 22일 경성지방법원의 결심공판에서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형에 선고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경희는 1923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45)

 그는 부인의 정성어린 옥바라지 끝에 1924년 5월 25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이때 언론에서는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가족은 철창 밑에 가족들은 주럼에 울고 있는 의열단원의 가정. 차마 못 볼 일 이경희 가족

 「조선독립혁명선언서」의 다수한 문서를 각 관공서에 대담하게 대부를 하고 황옥과 함께 옥○자리에 세상과 등을 진 이경희의 가족은 또 얼마나 비참한 생애를 하는가. 그 부인 조씨는 본시 서간도에서 살은 여사로 이경희가 조선에서 망명하여 간도 지방으로 표류를 하며 조선 독립을 촉진하기에 노력하는 중에 부부가 되어 인원仁媛(8)이라는 딸과 작년에 낳은 재춘在春이라는 아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던 것이다. 부부는 그간 경성에 돌아와 안국동 10번지 아래 방 한 칸을 매삭 6원에 세를 얻어서 근근히 지내이며 이경희는 생도를 구하고자 홍정의술원紅精醫術院을 다니라고 설비에 착수까지 하여 놓고 마침내, “조선독립을 열망하는 피고는…”하는 죄목을 입고 황옥과 같이 철창 하에 눕히게 되고 만 것이었다.

 가뜩이야 조반석죽도 여의치 못하던 집안에 하늘과 같이 믿던 남편이 산 지옥으로 끌려 나가고 마니 외로이 떨어진 조씨는 어린 자식 남매를 데리고 넓은 천지에 다시 바라고 향할 곳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옥중의 가장을 위하여 모든 부끄럼과 염치없음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는 굶고 아이들은 주려가면서라도 어린 아들은 업고 인원이는 걸어가면서 각 처로 지천을 찾아다니며 ○○○의 ○성하여져서 하는 수 없이 사식을 중지할까 하는 생각조차 여러 번 들어갔으나 옥중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이의 처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워 누구에게든지 염치없는 동정을 청할 용기가 나게 된다한다. 남편 면회를 하러 다니는데도 오전의 차비조차 군졸하야 동소문 안에서 독립문 막바지까지 걸어서 왕래를 하느라고 등에 업힌 어린 아이의 고운 얼굴을 무참히도 검게 타고 말았으니 그 열을 대하고 애를 끊은 이가 다만 그 어머니뿐일는지.”46)

의열단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던 이경희는 1924년 5월 26일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서울 종로 6정목에서 정양을 취했다.47)


Ⅳ. 신간회 대구지회 회장과 본부 총무간사 활동


 1927년 민족통일전선의 형태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이경희는 1927년 6월부터 송두환, 최운동 등과 신간회 지회를 설립하기 위해 몇 차례의 예비 모임을 가졌다.48) 그 뒤 같은 해 7월 23일 교남기독청년회관 상층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치 준비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이경희를 비롯한 20여 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정하였다.49)


 신간회지회설치준비회 준비위원

 이경희李慶熙, 김태련金兌鍊, 장적우張的宇, 광진영, 박보형朴普亨, 이재영李在榮, 송기찬宋箕贊, 이능식李能植, 박제원朴齊元, 김리용金利龍, 김하정金夏鼎, 장인환張仁煥, 최윤동崔允東, 허병률許秉律, 이상화李相和, 홍주일洪宙一, 서만달徐萬達, 김성국金成國, 장향명張向鳴, 송두환宋斗煥 임시당무 최윤동, 곽진영, 장인환


 준비위원 중 장적우, 김리룡, 장하명 등은 사회주의 계열에 속하고, 이경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경우는 민족주의 좌파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신간회 대구지회 준비위원회의 구성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적극성을 읽을 수 있다.50) 물론, 1920년대 대구지역 사회운동을 고려할 때,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소극저이라거나 미약하다고 볼 수 없다. 또 대구지역 실력양성론의 민족주의 우파는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중심으로 대구상공협회를 결성하거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조선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51)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27년 9월 3일 조양회관에서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 대회가 개최되었다. 회원과 방청객 등 내빈 6백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정·사복 경찰 20여 명의 엄중한 경계 속에 열린 설립 대회는 회원 점명, 임시집행부 선거, 지회 규약 낭독과 규칙 통과, 본부 파견 인사의 신간회 설립 취지 및 전체 진행 상황에 대한 설명, 내빈 축사, 경과보고, 임원선거, 만세 삼창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 설립대회에 참석한 신간회 본부 인사는 안재홍과 홍명희였다.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 대회 준비위원장이었던 이경희가 초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신간회 대구지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52)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 당시 회원 수는 약 150명 정도였다. 1927년 12월 신간회대구지회 제1회 정기대회에서 회장직을 부회장 최윤동에게 넘겨주고 일반 회원이 되었다.53) 이 대회에서 새롭게 편성된 간부들은 설립대회 때와 달리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변화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경제연구회의 동향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 대구지회의 활동을 살펴보면54), 먼저 달성군 화원면과 옥포면에 신간회 대구지회 화포분회를 설치하였다.55) 다음으로 대중교양 및 의식 함양에 적극적이었다. 곧 달성군에 6개의 노동야학을 운영하거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실시하였다. 그 다음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사상강좌회를 개최하여 학생층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활동을 펼쳤다.56)

 여기에 신간회 대구지회의 장적우, 김선기, 박광세 등이 강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사상강좌회를 통해 대구고보에 적우동맹 등 학생비밀결사가 조직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1928년 대구지역 동맹휴교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그 뒤 1929년 신간회본부는 공석이 된 총무 간사 및 간사를 보선했다. 이때 이경희는 이옥李鈺, 오화영吳華英, 조병옥趙炳玉 등과 총무 간사로 선출되었다.57) 또 1927년 신간회 정기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준비위원회에서 서무부원이 되어 활동하였다.58) 이때 신간대회 준비위원회의 부서와 담당은 다음과 같았다.


 신간대회 준비위원장 ; 허헌

 서무부장 오하영, 부원, 이경희, 홍명희, 김향규, 이동욱, 김응집, 권승렬, 민중식, 김인수, 김세진, 박양신, 박세영, 한봉석

 재무부장 조병옥, 부원 이원형, 김명동

 규약부장 이종린, 부원 조헌영, 이시완


 이처럼 이경희는 신간회 대구지회 설립준비위원과 대구지회장을 거쳐 신간회 본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이경희가 신간회대구지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회장을 그만 둔 것은 1927년 10월 대구에서 조선경제연구회朝鮮經濟硏究會를 결성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조선경제연구회는 1927년 10월 16일 조양회관에서 발기총회를 통해 창립되었다. 여기에는 30여 군에서 108명의 발기인이 참여하였다. 준비위원으로 이경희를 비롯하여 박해돈朴海暾· 이선호李宣鎬· 최준崔俊· 이상린李相麟· 장직상張稷相· 이도화李鍍和· 최해종崔海鍾· 김승묵金昇黙· 이근영李根泳· 권태소權泰韶 등이 선출되었고, 대표는 김승묵과 최해종이 맡았다. 조선경제연구회는 강령으로 ‘① 민중생활을 개선하여 조선인 경제운동을 환기함, ② 유민遊民의 인습因襲을 타파하고 노동勞動의 관념觀念을 고취鼓吹함, ③농촌문제農村問題를 연구하고 경제교육을 보급함, ④ 실지實地의 사업을 흥기興起하여 산업의 발전을 조장함’ 등 4개항이었고, 민중생활의 개선을 통한 경제의 발달을 표방하였다.59)

 하지만 조선경제연구회에 대한 지역의 여론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곧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은 경제연구회에 대해 ‘취지를 검토한 결과 운동선을 혼란시키는 반동단체 혹은 이류단체’로 규정하고, ‘반대 궐기문을 작성하여 대구시내 각 사회단체 연합대책강구회의 소집을 결의하였다.’60)

 또 신간회 대구지회도 경제연구회가 ‘신가회 권내의 사업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니 회가 성립되게 해달라’고 요청해온 것에 대해, ‘모든 민중이 단일당의 기치 밑에 모여드는 터인데 경제연구회란 것을 조직함은 상대적 혹은 반동적이니 양해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표방하였다.61)

 지역사회가 조선경제연구회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한 것은 조선경제 연구회에 주도 세력의 사회활동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2) 또한 경제연구회가 표방한 강령의 실효성에 강한 의문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여론은 조선경제연구회가 신간회와 같이 민족적· 정치적 입장을 지니지도 못한 것이었고, 민족적· 경제적 입장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63) 이러한 조선경제연구회에 이경희가 참여하게 된 계기는 사람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곧 조선경제연구회의 이선호와는 교남교육회에서 함께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또한 이경희의 활동 경험에서 나타나는 실력양성론적 입장이 반영되어 조선경제연구회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하튼 이경희가 대구의 우익 세력들이 신간회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채 조직화에 나선 조선경제연구회에 참여했다는 점은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이경희가 신간회 대구지회 회장을 계속 수행하기 어렵게 된 것으로 판단되며, 신간회 1회 정기대회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세력이 주요 간부에 포진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경희는 1928년 재정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회복시키기 위한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서상일의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에 대한 전후관계前後關係」(1928)를 통화 살펴볼 수 있다.64) 당시 서상일은 자치운동을 전개하였고,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고 있던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에 속했다. 서상일이 중외일보 투자와 관련한 최초 접촉은 1927년 백산상회의 안희제로부터 이루어졌다. 안희제는 서상일에게 중외일보 인수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경남의 윤현태, 이우식, 경북의 최윤동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들이 서상일에게 요청한 것은 중외일보 발기인 및 2백주 규모의 주식 인수였다. 그러나 이를 둘러싸고 양측의 입장이 정리되지 않자 대구의 김관제金觀濟가 나서 중재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이처럼 중외일보 회생을 위한 노력에 참여한 최윤동, 안희제, 김관제, 서상일 등의 인물들은 한말 교남교육회, 대동청년단 등에서 이경희와 함께 했던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끝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한 채 이경희 등은 서상일을 향해 “서상일은 자치주의자요 우경사상가이며, (중외일보-편집자) 발기 초에는 냉담하다가 1년 간 피와 땅으로 설립한 기성사업을 계획적으로 횡령 탈취하려 한다.”등의 내용으로 비난하였다.65) 이후 중외일보는 1929년 9월 다시 창간되었다. 그 뒤 4년 동안 안희제· 이우식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경희는 신간회 본부 총무간사로 활동하는 가운데 1928년 11월 11일 밀얄경찰서에 의해서 검속 당하였다. 66) 일제 관헌에 따르면, 그가 밀양에 와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를 지도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신간회본부의 총무간사가 경남 밀양에 내려온 실제 이유는 밀양에 살면서 건강이 악화된 딸의 병문안 때문이었다. 일종의 해프닝이지만 이경희가 식민지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던 사회적 비중이 적절히 반영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Ⅴ. 해방이후 건국 활동과 미군정 참여


 해방 이후 이경희는 1945년 8월 16일 대구의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서상일徐相日· 백남채白南採· 배은희裵恩希· 엄성문嚴成文· 서동진徐東辰· 장인환張仁煥· 이재영李在榮· 송기찬宋箕贊· 정운일鄭雲馹 등과 함께 치안을 유지할 단체 결성에 합의하였다.67) 8월 17일 이들은 대구일일신문사에서 경북치안유지회를 결성하고68), 서상일을 대표로 선출한 다음 8월 18일 공회당에서 정총대町總代 회의를 열어 협력을 요청할 계획이었다.69) 경북치안유지회는 8월 22일에 앞서 김관제金觀濟, 채충식蔡忠植, 정운해鄭雲海, 이상훈李相薰 등이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회와 합동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이하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동 위원회는 위원장으로 김관제, 부위원장에는 백남채를 각각 선출하였다.

 그 뒤 이경희는 상경하여 서울에 머물렀다. 이경희는 1945년 9월 서울에서 우익 계열이 준비한 국민대회준비회에 관계하였다. 국민대회준비회는 9월 7일 동아일보사에서 열렸고, 이 대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주비위원회를 발전적으로 개편하여 발족한 것이었다. 대회는 김준연의 국민대회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는 개회사에 이어 송진우의 경과보고에 따라 임정을 지지할 것과 연합국에 감사를 표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회에서 위원장에 송진우, 부위원장에 원세훈· 서상일, 상임위원에 이경희를 비롯하여 김성수· 윤치영· 최윤동· 김삼규 등이 선임되었다.70)

 또한 이경희는 1945년 10월 18일 결성된 경북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의 인선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김관제와 함께 위원장으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위원장 인선에서 빠지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때문이었다. 하나는 서울에 계속 머물면서 정치 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다른 하나는 지역에서 이경희는 중도 내지 우익으로 분류되었다.71)

 그즈음 이경희는 미군정이 대구에도 실시되면서 경북 부지사와 대구부윤에 차례로 취임하였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 10월 1일 미군이 대구에 왔다. 1945년 10월 13일자로 일본 관리들이 정식 파면 조치되고, 이어서 미군정 경북지사와 대구부윤이 취임하였다.72)

 1945년 12월 이경희는 미군정의 경상북도 부지사로 추천을 받아 1946년 1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였다. 그 과정은 이러했다. 1945년 11월 3일 서상일과 최윤동이 미군정청의 특사로 대구를 방문하였다. 그 목적은 미군정청의 시정 방침을 일반 대중에게 주지시키고,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여 군정에 반영하는 역할과 경북 군정청의 행정 고문회를 추천하기 위한 것이었다.73) 두 특사가 추천한 관선 도 고문道 顧問은 최종철, 김찬수, 장기상, 이상무, 장인환, 정운일, 오기수, 박노수, 김관제, 김재명 등이었고, 관선 부 고문府 顧問은 김태련, 정운기, 박래승, 김하정, 이재영, 오용기, 양맹식, 김종구 등이었다.74) 이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계열에 속했다.75) 여기에 민선 도 고문과 부 고문이 선출됨으로써 경상북도 및 대구부 행정고문의 선출이 완료되었다.

 1945년 12월 20일, 21일 양일간 열린 미군정청 경북도고문회는 이경희를 경상북도 부지사, 김의균金宜均을 지사로 추천하였다. 이에 경북도군정 도지사 레이몬드 재노스키(Raymond A.Zanowski) 대령은 이경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경북부지사 위촉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이형李兄 몇 마디 말씀을 드리게 됨을 기뻐합니다.…도道 고문회의顧問會議가 12월 20일, 21일 양일간 개최됐는데…귀하를 조선인 지도자로서 본관에게 천거하였기에 본관은 이에…민정관民政官 즉 본도부지사의 사무와 직책을 귀하에게 위임토록 아놀드 장군에게 추천합니다. 금일…본관 사무실에서 귀하의 내방을 맞았으면 감사하겠습니다.”76)


 이경희는 1946년 1월부터 경북 부지사에 취임하였다. 그 뒤 같은 해 2월초 경상북도 부지사에서 초대 대구부윤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46년 3·1운동 기념식에서 미군정청 대구부를 대표해 인사 말씀을 진행하였다.77) 대구부윤으로서 가장 관심을 가진 일은 식량 부족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1946년 초 대구에서는 쌀 품귀현상이 일어나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당시 식량 부족 문제는 귀환동포로 인한 인구의 급증에 미군정의 미곡정책, 한국인의 쌀 안비, 매점 매석 등이 겹쳐 발생한 것이었다. 대구부윤 이경희는 식량문제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식량문제의 자주해결이야말로 자주독립 능력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라는 호소 담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78)

 이경희 식량문제 호소 담화 발표 뒤인 3월 11일 대구에서 첫 기아데모가 일어났다. 수백 명이 경북 도청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대구부청에 몰려가 기아데모를 벌였다. 이때 대구부청에서는 부윤 이경희, 부부윤 권영세, 농상과장 허흡, 후생과장 이건영 등이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임시조치를 마련하였다. 각 정회장으로부터 극빈자란 증명을 받아오면 한 사람 당 쌀 한 되, 잡곡 한 되씩을 긴급 배급하기로 15일로 예정된 임시배급도 12일부터 주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79) 이러한 기아데모는 1946년 4월 1일 대구부청 앞에서 두 번째 시위를 거쳐 1946년 7월 1일 대구부청 앞에서 수천 명이 군중이 집결하여 벌어진 3차 시위로 확산되었다.80) 이때 부윤 이경희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청으로 달려갔으나 도청에서도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특히, 3차 기아 데모를 거치면서 지역의 민심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81)

 이때 이경희는 대구 부윤을 사직하였다. 그것은 식량 위기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마련하지 못한것에 대한 책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식량문제에 대처하는 미군정의 정책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인의 사정에 밝은 그가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더욱 분발하지 못한 못내 아쉽게 느껴진다. 1946년 7월 5일부로 부부윤 권영세가 대구부윤으로 취임하였다. 경북도지사 김의균은 10월항쟁 직후에 “나 자신부터 민중에 대해서 면목이 없다. 미안하여서 아직은 이 자리에서 앉아서 우선은 성의껏 사건 후의 수습책에 전념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지사를 사임하였다.82)

 이경희는 1946년 3월 9일에 조선독립경북독립촉진회와 조선신탁반대국민총동원 경북위원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경북국민회(이하 ‘독촉국민회’)의 지부장이 되었다.83) 경북독촉국민회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안에 대한 입장으로 자연스레 지역 우익의 결집체였다.84) 또한 1946년 5월 17일 만경관에서 대한독립촉성대구시국민회가 결성되었다. 경북독촉국민회의 초대 회장에 김하정, 부회장에 이영식 등이 선출되었다. 그 뒤 1947년 무렵 이경희가 경북독촉국민회 회장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미소공동위원회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경희에게 보내진 독촉국민회 이승만· 김구 명의 또는 이승만 명의의 밀신에서 확인된다.85) 이처럼 해방이후 이경희는 우익의 입장에서 통일국민국가를 건설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신타통치에 적극 반대한다거나 좌익과 강한 갈등 관계를 표출하는 모습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1948년 분단 이후 이경희는 1949년 7월 남선경제신문(지금의 매일신문)의 사장에 취임하여 같은해 12월 4일 사망 때까지 지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회 활동이었다. 한말 계몽운동에서 시작된 그의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86)


Ⅵ. 맺음말

 

이상에서와 같이 이경희의 생애와 민족독립운동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경희는 서울의 기호중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호중학에서 한국 근대를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교남교육회, 대한협회 대구지회와 연관된 달성친목회와 사립 협성학교, 대동청년단,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등 다양하고 역동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 대구지회, 달성친목회 등은 실력양성론적 계몽운동과 가까웠고, 대동청년단과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등은 독립전쟁론에 근접해 있었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기지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경희의 운동론은 실력양성론에서 독립전쟁론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였다.

 3·1운동 이후 이경희는 국내에서 조선노동공제회, 단연동맹회 등의 운동을 거쳐 1927년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전개된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조선경제연구회의 결성, 중외일보 회생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조선경제연구회의 결성, 중외일보 회생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양자의 구성 인물들은 전자는 우익 성향이 강한 반면 후자는 민족주의 좌파의 성향이 강했다. 이처럼 이경희는 좌우를 포함하는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곧 이경희의 운동 노선은 실력양성론적 입장과 비타협적 운동 노선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런 이경희의 정치적 성향은 해방후 미군정기 국가건설 관정에서 한민당 계열과 함께 활동하는가 하면 미군정과도 협조적인 관계를 맺어 대구부윤과 경상북도 부지사로 활약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성향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함께 한 민족독립촉성국민회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후 이러한 정치적 성향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대구부윤을 스스로 사임한다거나 한민당과의 관계도 강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경희의 생애와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에 속해 있으면서 좌파의 성향이 강했던 인물로 판단된다. 해방후 국가건설 과정에서는 우익의 입장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다만, 그가 1948년 남북분단을 경험한 뒤 1949년 사망함으로써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통해 이루려 했던 통일국민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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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보훈처. 「포상자 공적조서」 참조. 

2) 『仁川李氏大同譜』 820~821쪽 ; 『회원수첨』. 在邱迎日鄭氏萬戶公派親睦會. 연도미상 12쪽. 

3) 김일수. 1999. 「대구권총사건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대구경북 49인』. 혜인. 123~128쪽. 

4) 『대한협회보』 제2호(1908.5) 57쪽; 『대한협회대구지회록』 1910년, “융희 2년 1월 25일 달본소학교에서 발기회를 개하고 서봉기, 임봉식 2씨가 본지회 발기 취지를 차제 설명한 후에 경 본회에 제출할 입회 및 지회 설립청원서를 선성하야 박승씨에게 교보하다. 본지회 임시사무소는 달본소학교로 차설하기로 의정하다.” 

5) 『대한협회대구지회록』 1910년; 『대한협회보』 제7호(1908.10), 72~73쪽, 회원명부에 이병두가 나타나는데, 한자가 柄斗로 되어 있다. 대한협회대구지회록은 손글씨이고, 대한협회보는 인쇄본인데, 대한협회보는 대합협회대구지회록의 한자 이름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잘못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6) 『기호흥학회월보 제 1호, 1908년 8월 25일, 본회기사. 49쪽; 김일수. 2006. 「대한제국 말기 대구지역 계몽운동과 대한협회대구지회」. 『민족문화논총』 25집.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참조.  

7) 『기호흥학회월보』 제9호, 1909년 4월 25일, 회중기사. 46~47쪽, 이 때 우등상을 받은 사람은 洪祐牲, 黃永老, 金夏榮, 尹柱炳, 朴萬緖, 李慶熙, 金豊鎭, 金學贊, 張東鎭, 李鍾讚, 崔宗煥, 河相敎 등이었다. 

8) 『기호흥학회월보』 제12호, 1909년 7월 25일, 회중기사, 48~50쪽, 이 때 2학년 우등상 수상자는 洪祐牲, 李慶熙, 金夏榮, 尹柱炳, 任承宰, 河相敎, 朴萬緖, 金豊鎭, 崔宗煥, 鄭河範, 李命燮, 兪燁, 高炳賢, 金學讚 등 14명이었다. 

9) 『교넘교육회잡지』 제3호, 1909년 6월 25일, 회원명부(속) 참조. 

10) 교육교육회와 관련해 다음의 연구성과들이 있다. 권대웅. 1996. 「한말 교남교욱회연구」. 『정덕기교수화갑기년논총』; 정관. 1987. 「교남교육회에 대하여」. 『역사교육논집』 10권 6호; 채위균. 2005. 「교남교육회의 활동 연구」. 『교육철학』 제28집. 

11) 김일수. 2011. 「1910년대 달성친목회의 민족운동」. 『한국학논집』 제45집.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64~265쪽. 

12) 嶠南敎育會에 관해서는 權大雄.1996. 「韓末 嶠南敎育會 硏究」. 『重山鄭德基博士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참고. 

13) 「達成親睦會」. 『嶠南敎育會雜誌』 제6호. 31쪽 

14) 『황성신문』. 1910년 6월 15일. 

15) 『황성신문』. 1910년 8월 13일. 

16) 김도형. 1999. 「한말 경북지역의 近代敎育과 儒敎」, 『계명사학』 제10집. 81쪽. 

17) 『대한매일신문』. 1909.9.25.; 大警 第2339號, 大正 8年 7月 24日, 達城親睦會 및 講遊園에 대한 復命書, 國史編纂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7, 國權回復團 1, 296쪽(이하『자료집』으로 약칭함). 

18)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14일. 

19) 『황성신문』. 1907년 9월 2일. 

20) 『황성신문』. 1909년 10월 8일. 

21) 「경상북도학교 일람표」. 1910년 11월 참조. 

22) 김일수. 2000. 『동암 서상일의 정치• 경제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쪽. 

23) 『황성신문』. 1908년 12월 12일; 1909년 5월 9일 

24) 『대한민보』. 1909년 8월 3일. 

25) 이양우. 「부산의 선각자」.『부산일보』 1981.10.22. 

26) 오미일. 2014. 「일제시기 白山商會의 창립과 변천」. 『영남학』 26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참조. 

27) 권대웅. 2008.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36~168쪽. 

28) 권두연. 2012. 「청년학우회의 활동과 참여 인물」. 『현대문학의 연구』 Vol. 48. 한국문학연구학회. 121쪽 

29) 「청년학우회설립위원회의정건(적요)」. 『소년』 2년 8권. 신문관. 1909.9, 15쪽; 권두연. 앞에 글. 206쪽에서 재인용. 

30) 군두연. 앞의 글. 131~ 

31) 「청년학우회보」. 『소년』 3년 3권. 1910, 71쪽. 

32) 독립기념과. 2004. 「청년학우회」. 『한국독립운동사 사전』(단체편) 참조; 신용하. 1989. 「新民會와 靑年學友會」. 「汕耕史學」 제3집. 참조. 

33) 「재외 조선인 경영 학교, 서당 일람표 송부에 관한 건」, 1917년 1월, 참조. 

34) 『現代史資料』 27권(朝鮮3권)(東京, ***書房) 163(또는 『현대사자료』 30권「조선6권」 162쪽, 李慶熙) 

35) 장석흥. 2009. 「훈촌 북일학교의 건립과 독립운동」. 『한국학논총』 31 참조. 


36) 「汪淸縣不逞鮮人第一高等國民學校職員及生從名簿」. 1916년 3월.  

37) 『동아일보』. 1921년 9월 4일. 

38) 김일수. 2003. 「일제강점기 대구노동공제회의 활동과 성격」. 『대구사학』 70집. 76~77쪽. 

39) 『매일신보』. 1921년 3월 31일. 

40) 『동아일보』. 1921년 7월 29일.  

41) 『매일신보』. 1922년 2월 24일. 

42) 『동아일보』. 1922년 2월 21일. 

43) 『동아일보』. 1923년 12월 23일; 1923년 1월 25일; 1923년 1월 27일; 1923년 2월 7일; 1923년 2월 9일; 1923년 2월 24일; 1923년 3월 3일; 1923년 3월 5일; 1923년 3월 8일; 1923년 3월 11일; 1923년 4월 10일; 1923년 5월 12일. 

44) 김영범. 2009. 『의열투쟁 1 -1920년대-』 

45) 「1923년 형공 제466호」.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46) 『동아일보』, 1923년 7월 22일. 


47) 『시대일보』, 1924년 5월 39일; 『동아일보』, 1924년 5월 31일. 

48) 『조선일보』, 1927년 7월 26일. 

49) 『매일신보』, 1927년 7월 25일. 


50) 경북지역의 신간회 지회 유형에 대해서는 이윤갑(2004)의 「일제하 경상북도 지역의 신간회 지회운동」. 『동방학지』 제123집 참조.  

51) 1920년대 대구지역 부르주아 민족주의 우파의 동향에 대해서는 김일수(2000)의 『동암서상일의 정치· 경제 이념과 사상』.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참조. 


52) 『조선일보』. 1927년 7월 26일; 『동아일보』. 1927년 9월 6일; 『조선일보』. 1927년 9월 3일; 『조선일보』. 1927년 9월 8일. 

53) 『중외일보』. 1927년 12월 31일. 


54) 신간회 대구지회의 홀동에 대해서는 남정원(2005)의 「1920년대 후반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과 활동」. 계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참조.  

55) 『조선일보』. 1927년 11월 29일. 

56) 김일수. 2002. 「1920년대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대구고보를 중심으로-」. 

57) 『동아일보』. 1928년 8월 5일; 『조선일보』. 1927년 1월 29일. 

58) 이균영. 1993. 『신간회연구』역사비평사. 160~161쪽; 『조선일보』, 1929년 2월 4일; 『동아일보』. 1929년 2월 9일. 

59) 『동아일보』. 1927년 10월 19일. 

60) 『동아일보』. 1927년 11월 2일. 

61) 『조선일보』. 1927년 11월 14일. 

62) 이선호는 慶一銀行 전무, 산내식금고제조회사 경영, 경북도평의회 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장직상은 왜관금융창고주식회사, 慶一銀行, 동아인촌주식회사, 조양무진주식회사 등을 설립하거나 자본을 투자했고, 대구부회· 경북도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1927년 당시 대구상업회의소 회두로 활동하였다. 최준은 경주의 만석꾼의 지주로서 백산상회· 大邱銀行· 경남은행· 경성방직 등에 자봊을 투자하였고, 식산은행장이며 총독부의 오른팔이었던 아리이와 두터운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김승묵은 대구청년회 사회부장· 반관적인 사회사업연구회의 서기를 역임하면서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다. 최해종은 대구청년회원으로 활동하면서, 1923년 동아일보의 대구지국장이 된 서상일 밑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63) 김일수. 2000. 『동암 서상일의 정치· 경제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86~87쪽. 

64) 이 때의 중외일보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서상일이 육필로 남긴 「중외일보사에 대한 전후관계」(1928)가 유일하다. 일제하 조선인 발행의 중앙일간지 가운데 재정난으로 인한 변동이 가장 심했던 중외일보의 사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료이다. 다만, 서상일 자신이 직접 기록한 것이어서, 객관성이 다소 떨어질 수도 있다. 이 자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앞부분은 1927년경 중회일보 재 발간에 대한 사정을 기술되어 있고, 뒷부분은 중외일보 참여자의 서상일에 대한 비난을 서상일 자신이 해명하거나 재질의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중외일보에 대한 입장을 해명하는 형태의 글이다. 

65) 중회일보에 관해서는 김일수의 『동암 서상일의 정치· 경제 이념과 활동』 64~70쪽을 참조하였다. 

66) 『동아일보』. 1928년 11월 18일. 

67)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73.『大邱市史』 3권. 92쪽. 

68)영남일보사. 1946. 『慶北摠監』. 1~2쪽 

69)이원식. 1964. 『잃어버린 나의 반세기 노트』. 8쪽; 이원식은 16일 밤에 石輔, 이갑기, 김종구, 임재화, 등과 치안 유지에 대한 대책을 최의한 후 서상일을 찾아가서 치안대책을 위한 당체 결성의 필요성을 제안하였고, 이에 서상일이 동의함으로써 경북치안유지회가 결성된 것으로 회고하였다. 

70)古下先生傳記編纂委員 編 , 『古下宋鎭禹先生傳』, 동아일보사, 1965, 312~314쪽;『매일신보』, 1945.9.2.; ▲결의사항 1) 在外 大韓民國臨時政府 지지에 관한 것을 상정하여 전원 총기립으로 찬동의 결의를 표명하고, 2)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에 관한 건을 상정 협의한 결과 宋鎭禹 張澤相 尹致暎 金昌植 崔允東 白象圭 6씨를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되었다. 3) 당면의 諸問題에 관한 건과 국민대회 소집에 대한 준비는 전국 각지 각층을 총말라한 백 명의 집행 위원을 선출하여 일임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3천만 민중의 總意와 總力量을 집결할 국민대회소집과 연합국에 대한 감사표시는 착착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 임원 委員長 宋鎭禹 副委員長 徐相日· 元世勳, 常任委員(無順) 金性洙 金俊淵 金炳魯 金智煥 金東元 金秉奎 金勝文 李仁 白寬洙 張澤相 尹致暎 安東源 林正燁 姜炳順 韓南洙 宋必滿 朱基鎔 高義東 梁源模 白南敎 李順鐸 金良假 李慶熙 崔允東 徐相國 高在旭 高光表 曹正煥 姜仁澤 張德秀 張龍瑞 姜樂遠 金時中 趙軫九 閔重植 李熙晟 林炳哲 吳基水 李容漢 李昇泰 梁會英 陳奉燮 沈川 金東煥 敦福山 蔡廷根 羅承圭 金晉燮 金口根 李允植 金三奎 

71) 정영진. 1990. 『폭풍의 10월』. 한길사. 121~122쪽. 

72)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95. 『대구시사』. 1202쪽. 

73) 『영남일보』. 1945년 11월 6일. 

74) 『영남일보』. 1945년 11월 17일. 

75) 김일수. 2000. 『동암 서상일의 정치·경제 이념과 활동』.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32~134쪽. 

76) 『Korea News』. 2014.12.22. 

77) 『영남일보』. 1946년 3월 4일. 

78) 『남선경제신문』. 1946년 3월 9일. 

79) 정영진. 앞의 책. 231~233쪽. 

80) 『영남일보』. 1946년 7월 2일. 

81) 정영진. 앞의 책. 234~249쪽. 

82) 김일수. 2005. 「역사가 김석형의 역사학」. 『역사와 경계』 54. 35~36쪽. 

83) 『영남일보』. 1946.3.14. 

84) 김일수. 2001.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대구지역 정치세력의 대응」. 『사림』 제 16호. 99~102쪽. 

85) 「밀신」. 대구근대역사관 소장. 

86)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 포장, 1990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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