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이협락
작성일 2007-01-25 (목) 11:57
ㆍ추천: 23  ㆍ조회: 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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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澄玉 장군을 아시나요!

 

                                


 



 

忠剛公(李澄玉장군)께서는 계룡산 동학사에 있는 숙모전과 영월단종능에 있는 배식단소에 사육신과 더불어 충신으로 모셔저 있습니다.

 

   世祖는 세조3년 그의 肅慕殿 招魂記에서 장군을 가르켜 今世之亂臣 後世之忠臣이라 하면서 바로 신원 하였습니다.

   즉 그대는 나에게는 난신이오나 후세에 사람들은 그대를 둘도없는 충신으로 우러러 받들게 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학자 지상찬 선생은 언론의 자유가 없었던 일제시대에 펼처낸 그의 4000년 비사에서 그리고 황의돈 박사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의 역사강의가 금지된 그의 교단에서 장군을 가리켜 우리민족 5000년 역사에 있어 가장 으뜸가는 민족적 영웅이라고 하였습니다.

 

1. 1483. 10. 8.  6진개혁에 30년간 몸바친 함경도 도절제사이징옥장군은 고구려 후손들인 여진족들의 추대로 대금국 황제가되었으나 이의수도 오국성을 향해북진도중두만강변 종성에서도강 저날밤 세조에 과잉충성한 정종일당의 민족적배신행위로 암살당하므로서 대금국 건국은 불발된바있습니다.

 

2. 만약 이징옥 장군이 암살당하지 않고 무사히 두만강을 도강하였더라면 우리는 고구려의 옛땅을 영토로한 대민족국가를 건립함으로서 동양에 제일가는 강대국이 되었을 것이고그후 있었던1592년 임진왜란.1637년병자호란.1910년 일제식민지와 같은 민족적 치욕의 역사는 자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따라서 이징옥 장군의 죽음은 대민족 국가의죽음이요,이징옥장군을 잃은것은 대영토(만주땅 전역과 대몽고 및 연해주)를    잃은 것입니다.

 

4. 이와같이 동족의 손에의해 이징옥장군이 암살당하자 이때 뭉처진 여진족의 힘은 그후 청나라의 시조 건주위의 추장 누루하치의 조부 키진키에게로 넘어갔고 이에 뒤를 이은 누루하치는 중원까지 진출하여 청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대금국의 불발로 실종된 고구려의 옛땅은 청나라가차지하게된 것입니다.

   (주)-청나라는 그후 1915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되었고중화민국은 그후 1949년사회주의혁명에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되었습니다.

 

5. 따라서 대금국의 불발로 고구려의 옛땅은 실종되엇으나 대금국의 역사는 그가 극히 짧다고 하더라도민족사적의의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민족사에 영원히 남게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징옥 장군 소년시절의 일화※


1. 번암문집 및 박종화선생의 역사소설 한구절에서 살아 있는 멧돼지를 보고 싶다는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형징석은 황소 만한 멧돼지를 잡기는 하였으나 몰고올수없어서 결국 죽여 서메고 당일 돌아왔으나 징옥은 황소만한 멧돼지를 3일간 추격하여 기진맥진 시킨 끝에살아있는채로 몰고오니 어머니는 그효심에 탄복하면서 너의 힘과 지혜는 천하를 호령할만한 대장군이 되고도 남겠다고 칭찬하니 이때 징옥은 반문하기를왜우리나라는 4000년 역사 민족이면서 한번도 황제국이 되지못하고 남의 속국이되어 강대국의 눈치만 살펴야합니까.나는장차 황제국을 세워서 자주독립 국가의황제가 되고 싶다고하자 어머니는 크게 놀랐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점에있어 역사학자 박종화선생은 사대주의 사상이 만연된그시대의 사람으로서는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엄청난 생각이다.이는 우리민족의 참다운 정기를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에 심취되고 있는 사대부들의 가슴에 비수를 찌르는일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2. 방기환선생은 역사소설에서 소년징옥은 김해부사정종을 찿아가서 호식을 당하는 민폐를 척결 하겠다고 제안하자 김해 부사 정종은 그를 얏보고 즉석에서 거절하자 이에 격분한 징옥은 당일 김해골 큰산에 올라가서 살아있는 호랑이를 잡아서돈 좋아한 놈은 호랑이맛을 보야 한다고 호통하면서 김해부사 관아에 투입하니 김해부사 정종은 크게 놀라서 제발 호식만 면하게 해주면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간청하니징옥은 그를 용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길가에 남편이 호식당한 한여인의 슬픈 사연을 듣고 즉석에서 그 호랑이를 잡아그 여인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고 한다.이소식을 들은 김해부사정종은수일후 뇌물을 갖고 징옥을 찿아가니 징옥은 조선조 태조때 공조판서를지낸바 있는 이판서(이전생)의 둘째 아들임을 알고안절부절 하였으나 징옥은 뇌물을 거절하 면서도그를용서 하였다.당시 김해부사 정종은 후일 징옥장군이함길도 도절제사로 있을때 그휘하에 있는 종성부사였다.그러나 징옥장군은 정종이 왕년에 김해부사 였음을 모르고 있고 정종은 왕년의 호랑이를 잡아 관아에 투입한 징옥장군임을 알고 지난일이 탄로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항상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영북진 소년절제사 이징옥 장군의 실화※

 

1. 이징옥 장군은 17세때 무과 및 무과 특시에 급제한후 당시 과거 시험관이였던 김종서의 추천을 받고 영북진 소년 절제사(사단장급)가 되어 현지에 부임하여 여진족을 평정할 때 창과칼로 다스린것이 아니라 무위와 덕으로 다스렸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여진족과 합동하여 친선산양(수렵)대회를 자주 개최한 사실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2. 여진족들은 이징옥장군이 나타나면 10리밖에서 무릎을 꿇고 복종 하였고(왕조실록),그들의 마음속에는 이징옥장군을 대할때는 적국의 장군이 아니고 그들의 장군이고 영도자로 받드는 태양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다. (박종화선생의 역사기록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슴)


3. 전 고려대학교 김성준 교수는 그의논문에서 6진개척의 최고 공신은 오직 이징옥장군이고 6진개척의 모든 영광은 이징옥장군에게 돌려야 한다고 역설 하였다. 그리고 김영곤선생은 그의 역사소설에서 이징옥장군이 두만강을 무사히 도강하였더라면 역사는 완전히 바뀌어젔을 것이라고 제2의 용비어천가가 탄생 하였을 것이다 라고 역설한바 있다.

 

※계유정란과 이징옥 장군의 대금 황제국※

 

1. 1453년 가을 계유정난이 발생된 당시의 주변정세를 살펴보면1449년 중국 명나라의 정통 황제가 몽고 폐잔병 출신인 에센태사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생포당함으로 해서 국내 도처에서 내란이 생겼다. 이로 인하여 명나라는 안동도호부(여진족을 다스리는 총독부)의 통제가 무력화 되었다.


2. 이때 만주땅에 살고있는 사람은 모두가 고구려의 후손들이였고 그들은 우리들보다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지배를 벗어날 기회를 항상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여진족 (5개부족)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민족 국가를 세우려고 수차 모임을 가젔으나 영도자 문제에 합의를 못보고 있다가 끝내는 그들의 마음속에 태양과같이 우러어 보고있던 이징옥장군을 그들의 영도자로 모시기로 하고 합의를 보았으나 이뜻을 함길도절제사의 중책을 받고있는 이징옥장군에게 전할길이 없었다. (차상찬 저서 400년 비사 및 김영곤 저서 황비열전 참조)

 

3. 이때 조선국내에 있어서는 1453년 계유정난이 생겼다.수양대군은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를 제거하고 실권을 잡기는 하였으나 이징옥을 그대로두면 안된다고 계산하고 그의 심복인 박호문을 함길도 절제사 관아에 있는 함경도에 급파 하였다. 이때 박호문은 이징옥장군에게 급히 상경하면 병조판서가 될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징옥장군은 이말을 듣고 약간명의 부관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는길에 올랐다.

 

4. 상경도중 부관이 의견을 제기했다. 그 내용인즉 문종1년 이징옥장군이 왕의 밀지를 받고 함길도 절제사로 다시 부임할 때 나라에 큰변이 없는한 절대 소환하지 않겠다는 밀지 내용을갖고 의문점을 제기했다.

 

5. 의문을 풀어볼 목적으로 이징옥장군은 왔던길을 되돌아 가서 박호문을 문책하니 박호문은 겁을먹고 서울(중앙)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되자 이징옥장군은 즉석에서 군법회의를 열고 군법회의의 결의에따라 박호문을처단 하였다.

 

6. 박호문을 처형한후 그여세를 집결하여 서울에 있는 수양대군을 응징하는길에 올랐다. 이것이바로 수양대군의 입장에서 본 이징옥의 난인 것이다.

 

7. 서울로 향하는 도중(길주부근)참모들이 또 의견을 제기 하였다, 그 내용인즉 손자병법에 의하면 앞뒤로 적을 맞이 하였을 때는 어느 한쪽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앞에있는 적은 수양대군이고 뒤쪽에 있는 적은 역시 여진족이다. 결국 얻은 결론은 여진족과 타협한다는 것이다.

 

8. 부관 김수산, 박문현을 특사로하여 만주땅에 파견 하였고 특사일행은 두만강을 건너 그곳에 있는 여진족 5개부족장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진족 5개부족장은 우리의 국내문제는 아랑곳없고 우리와 힘을 합하여 신라삼국통일때 잃어버린 고구려 영토인 만주땅을 다시찿아 민족의 웅비를 다짐하는 대금황제국을 세우고 그다음에는 명나라를 공격하여 동방의 맹주가 되면 단종을 옹립하는 문제와 수양세조를 응징하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역설 하였다.

 

9. 특사 김수산과 박문현은 여진족들의 끈질긴 살득에 감복하기는 하였으나 이징옥장군을 설득할만한 힘은 없었다. 이때 여진족 5개부족장은 진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의 부관 수명과 지도급신사 수십명을 인질로 보내겠다고 제의 하므로서 특사 일행은 이들 인질괴 함께 귀국 하였다.


10. 귀국한 특사 일행은 이징옥 장군에게 위 사실을 전하자 노발대발 하였으나 함께 따라온 인질들의 말을 들을때 깊은 뜻 과 진실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여진족들의 제의를 수락한 나머지 서울로 가는 대열을 되돌려 정반대쪽인 두만강을 향해 즉, 명나의 영토인 만주땅을 향해 대 행진을 하게 되었다. 이로서 이징옥의 난은 소멸되었고 잃어버린 만주땅을 다시찿는 대민족 운동의 막이 열렸다.

 

11. 이때의 모습을 역사학자 방기한선생은 그의역사 소설에서 배가 고파도 고픈줄 모르고 목아 말라도 마른줄 모르고 다리가 아파도 아픈줄 모르고 대민족 국가를 찿는 수만명의 대열은 실로 위대하고 장엄한 대민족의 대열이였다고 높이 평 하였다.

 

12. 한편 수양대군은 박호문을 죽인 이징옥의 반란군이 서울로 향하여 밀물처럼 진격해 오고있다는 전갈을 받고 크게 놀란 나머지 이징옥의 목을 베온자는 3계급 승진시킴과 동시 자손만대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해준다는 방문을 전국각지에 붙임과 동시 형 징석장군과 아우징규장군과 그 가족들을 전부 구금 하였다. 그리고 조정중신들은 이들 형제들은 3대9족 까지몰살시켜야 한다고 매일같이 성토 하였다.

 

13. 이때 완년의 김해부사로 있었던 종성부사 정종은 수양대군이 내건 이 방문에 현혹 되었다. 과거의 일들이 언젠가 탄로 나면 이징옥장군이 자기를 가만히 두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갖고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나머지 종성 진무사 이행검과 결탁하여 이징옥장군 암살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14. 이와같은 모의가 진행중인 것을 전혀 모르는 이징옥장군은 행군도중 황제에 즉위하고 황제의 깃빨을 들고 두만강 기슭인 종성에 도착 하였을때는 이미 초경 밤중이 되었다. 종성 부사 정종은 가진 수단을 다하여 하룻밤만 여기서 유하고 내일아침에 두만강을 도강 하기를 간청하자 장거리 행군으로 말미암아 부하들이 겪고있는 피곤한 모습을 가상히 여기고 하룻밤을 종성에서 머물기로 결정하고 정종부사가 제공하는 술과 안주에 전장병은 만취되고 말았다.

 

15. 이징옥장군은 물론 전체 장병이 곤히 잠들어 있을때 정종과 이행겸 일당은 벼장에 만들어진 비밀통로를 이용해 침입하여 곤히 잠들어 있는 장군의 가슴과 심장을 검과 창으로 마구찔렀다. 잠결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이징옥장군과 호위병인두 아들은 격투하기는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순절하고 말았다.(일부 학자들은 거짓으로 서울로 처들어 오든 도중에 암살당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왕조실록(노산군 일기)에 의하면당시 함길도 관찰사 조말생은 그의 상개장 보고서에서 이징옥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박호문의 애절한 하소연도 아랑곳 없이 처형하고, 부하장병, 관하관료 심지어 여진족까지 감언이설로 규합하여 자칭 대금국 황제라 칭하고 서울로 향하여 진격도중 종성부사 정종과 진무사 이행검에 의해 살해 되었다고 보고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후일 세조3년 세조는 죽어서는 아니될 장군을 죽게한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친 나머지이징옥 장군을 가리켜 금세지난신 후세지충신 이라고 신원 하면서 사육신과 더불어 숙묘전에 모시게 하였다.

 

16. 이때의 모습을 후세 역사가 박종화 선생은 그의 야사에서 하늘도 울고 땅도울고 산천초목도 울었다.5천년 역사이래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수있는 우리민족의 대웅비의 기회는 두번다시 오지 않으리라, 장군의 죽음은 대민족의 죽음이요 장군을 잃은것은 대영토(고구려의 옛땅)를 잃은 것이라고 흥분까지 하였다.

 

17. 일제때 민족사가로 이름 높았던 차상찬 선생(4000년 비사)은 물론 황의돈 박사는 그의 교단에서 우리나라 5천년 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에 있어 적으로 간주한 나라의 대장군을 자기들의 영도자로 추대한 역사는 일직히 없었다. 징키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도 세계정복을 함에있어 피로 물들인 역사외에는 없다.그러나 이징옥장군의 대금황제국 건국은 단, 한방울의 피흘림 없이 여진족들의 추대에 의한 대제국 건설한 점을볼때 이는 비록 단시일에 끝난 슬픈 역사이긴 하지만 이정신만은 길이길이 우리 민족사에 빛내야 한다고 역설 하였다.

 

18. 그러나 일부 사학자들은 이징옥 장군을 자칭 대금국 황제로 빙자하여 나쁘게 오도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 땅위에는 그 옛날 만연했던 사대사상의 뿌리가 남아 있는것 같아 보인다.

 

19. 없었던 것도 있었던 것처럼 하찮은 벼슬도 높은 벼슬을지낸것처럼 선대의 역사를 미화 시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세상흐름인데 있었던 것을 없었던 것으로 위대한 업적을 낮은 업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깎아 내리는 후손들이나 후세 역사 학자가 있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  그렇게도 우리나라민족문화를 말살 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던 과거 일제식민지시대의 그 모습, 그들에게 억눌렸던(또는 협조했던)잠재 의식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20. 어느 뜻있는 인사는 말씀 하시기를 선대의 업적이 제아무리 훌륭했다 하더래도 땅속에 파묻히면 녹쓸은 구슬만도 못 하다. 그러나 땅속에 파묻힌 녹쓸은 선조의 업적을 발굴하고 이를 재조명 하는 후손이 있다고 한다면 그후손은 그 선조가 이룩한 훌륭한 업적 못지않게 훌륭한 업적이 되고도 남음이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 후손인 우리들은 다시 한번 음미하고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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