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공도공종회
작성일 2007-01-08 (월)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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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의 파한집 발문
이인로의 파한집 발문

 『남화편(南華篇)』에 이르기를,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중매하지 않으니, 아버지가 칭찬하는 것은 그 아비 아닌 자가 하는 것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대개 듣는 사람들이 의심하기 때문에서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 진실로 아버지가 한 일을 글 속에서 아름답다고 칭찬하면 다만 스스로 비방을 자초할 뿐이니 또한 그 아들이 아닌 사람이 하는 것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경(戴經)』에 이르기를, “아비는 짓고 자식은 전한다.”고 하였으니, 옛날 동오(童烏)가 『태현경(太玄經)』에 참여한 것이 이런 것이고, 또 『노론(魯論)』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는 그 뜻을 보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동을 본다.”하였으니, 그 뜻과 그 행동을 다른 사람이야 어찌 그 방불한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오직 아들이라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남화편』의 말을 따르고 『대경』과 『논어』의 말을 어기어 선인의 뜻과 행동을 기록하여 영구히 전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행동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의 선인은 대금(大金) 천덕(天德) 4년 임신(壬申)년에 출생하시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의탁할 곳이 없었는데, 태숙(大叔)인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이 선인을 양육하면서 항상 좌우에 두고, 훈계하고 가르치기를 부지런히하여, 이에 삼분(三墳) 오전(五典)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을미(乙未)년 여름에 표방(豹榜)에 이름이 오르고 이듬해 가을에 현관(賢關)에 들어가 문예고시에 연첩하였다.
 또 경자(庚子)년 봄에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빙칭(氷淸)인 사업(司業) 최공(崔公) 영유(永濡)가 하정사(賀正使)가 되매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일행에 참여하여 이 해 섣달 스무 이렛날 어양(漁陽) 아모사(鵝毛寺)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곧 안록산이 군대를 훈련하던 곳이었다. 이에 시를 짓기를,

槿花低映碧山峯 무궁화는 나직히 푸른 산봉우리에 비치는데
卯酒初?白玉容 아침술이 처음으로 흰 얼굴을 붉히는구나.
舞罷霓裳歡未足 예상(霓裳)을 춤추고 마쳐도 즐거움 족하지 못하니
一朝雷雨送猪龍 하루 아침의 우뢰와 비에 저룡(猪龍)을 보내네.

   라 하였고, 그곳 서울에 들어가서 정월 초하룻날 관문 위에 춘첩자(春帖子)를 써 붙였는데 이르기를,

翠眉嬌展街頭柳 길가에 버들은 푸른 눈썹처럼 곱게 드리우고
白雲香飄嶺上梅 고개 위에 매화는 백설처럼 향기를 날리네.
千里家園知好在 천리길 고향은 편안히 있는 줄 알겠거니
春風先自海東來 춘풍이 먼저 해동으로부터 불어오네.

   라고 하였다. 써 붙인지 얼마 안되어 이름이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계양(桂陽)의 서기(書記)로 나갔다가 얼마 안되어 한림(翰林)으로 보직되어 모든 사(詞)와 소(疏)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 뒤 중국의 학사들이 우리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앞의 시를 외면서 지금 ‘그 분이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 하고 묻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선인이 처음 한원(翰院)으로부터 고원(誥院)을 거치는 동안까지, 무릇 14년 동안 왕명을 부연(敷演)하는 여가에도 경치를 만나면 붓을 들어 썼는데 문장이 샘물 솟듯하여 조금도 지체됨이 없으니 그 때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복고(腹藁)’라고 하였다.
 날마다 서하(西河) 기지(耆之)와 복양(?陽) 세재(世才)의 무리로 더불어 절친한 사귐을 맺고 꽃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같이 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세상에서는 죽림고회(竹林高會)라 하였다.
 술이 취하면 서로 이르기를, “여수(麗水)의 가에는 반드시 좋은 금이 있으니 형산(荊山) 밑에 어찌 아름다운 옥이 없겠는가. 우리나라의 경개가 봉래(蓬萊)와 영주(瀛洲)에 근접하여 예로부터 신선의 나라라 하였다.
  그 영험한 것을 모으고 빼어난 것을 길러서 오백 년마다 간간이 인재를 내어 중국에 아름다운 이름을 드날린 이로는 최학사(崔學士) 고운(孤雲)이 앞에서 선창하였고, 박참정(朴參政) 인량(仁亮)이 뒤에서 화답했으니, 그 후 이름있는 유학자와 승려들 중에 시를 잘 지어 이역에서 명성을 떨친 이가 대대로 있어 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진실로 거두어 기록하지 않으면 후세에 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하고 드디어 중국 바깥의 작품 중에서 본이 될 만한 것을 모아서 편차하여 세 권을 만들어 이름을 『破閑』이라 하고 또 동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한(閑)’이라고 한 것은 대개 공명을 이루고 난 뒤 벼슬에서 물러나 한적한 가운데에서, 별다른 욕심이 없는 이나 또는 산림에 은거하여 주리면 먹고 곤하면 자는 이라야만 그 ‘한’을 온전히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눈을 여기에만 붙이고 있으면 ‘한’의 온전한 것을 깨칠 수가 있을 것이나, 만일 세속 티끌 속에 빠져 시달리고, 벼슬자리에 얽매여 세태의 변천에 따라 동서로 헤매는 자들이 하루 아침에 실세하면 겉으로는 한가로운 것 같으나 중심은 흉흉할 것이니 이것은 또한 ‘한’이 병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눈을 붙이면 ‘한’의 병도 또한 나을 수가 있을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하니 그때 듣는 이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이 편집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아직 임금께 알려 드리지도 못한 채 불행히도 가벼운 병으로 홍도정제(紅挑井第)에서 돌아가셨다. 이보다 앞서 어린 손녀가 꿈을 꾸니 청의동자 열 다섯명이 푸른 기와 푸른 양산을 들고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러 부르기에 집종들이 문을 닫고 힘껏 막았으나 조금 있다가 잠긴 문이 저절로 열리고 청의동자들이 날뛰며 들어와서는 서로 축하하고 바로 흩어져 가버리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으니 어찌 옥루(玉樓)의 기(記)를 쓰기 위해 불려간 것이 아니겠는가. 등선하시던 날 저녁에 붉은 기운 한 줄기가 위로 견우와 북두의 사이에 뻗쳐 밤새도록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이걸 바라보는 이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이런 것이 대개 선인의 평생에 지낸 일이었다.
  문장의 뛰어남을 자부하였으나 문형(文衡)을 잡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항상 울울하게 지내다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어서야 비로소 시관의 임명을 받았으나 시석(詩席)을 열지도 못하고 하늘이 수명을 더 주지 않아 문득 돌아가셨기에 그의 흉중의 분기가 폭발하여 위로 하늘에 뻗친 것인지도 모른다. 슬프다. 평생에 저술한 고부 5수와 고율시 1500여 수를 손수 편찬하여 『은대집(銀臺集)』이라 하고 또 기로회(耆老會) 중에서 잡저한 것을 편찬하여 『쌍명재집(雙明齋集)』이라 하였다. 추부(樞府) 홍사윤(洪思胤)은 쌍명태위공(雙明太尉公)의 친척인데 일찍이 흥왕사(興王寺)를 관리하다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교장당(敎藏堂)에서 『쌍명재집』을 출판하여 세상에 전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판에 올리지 못하였는데 다만 여러 해 동안 집에 둔 것이 좀먹고 썩어 갈 뿐이었다. 임진(壬辰)년 초가을 몽고병이 크게 몰려와 송도를 약탈하니 성중이 요란하므로 강화도로 거둬 들어가는데, 그때 또 장마가 여러 달 계속되어 어린애들을 이끌고 노인을 부축하여 모두 갈 바를 모르고 구덩이에 떨어져 죽는 사람도 또한 많았다.
  내가 그때에 학유(學諭)가 되어 임금의 행차를 따라 다니며 갖은 고생을 하던 중에도 항상 유고를 싸가지고 다니면서 상자 속의 돈과 같이 여길 뿐만 아니라 한 자라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고 또 후대 자손의 보물이 되기를 원하여 자나깨나 잊지 못한 지가 50년이 되었는데, 근자에 사고로 벼슬에서 쫓겨나 기장현(機張縣)에 좌천되었더니, 그때 안렴사(按廉使) 태원왕공(太原王公)이 내가 있는 고을에 순행하여 민정을 묻는 여가에 선인의 유고에 말을 미쳐 나의 힘이 미약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잡문 300여 수와 『파한집』3권을 가져오라하여 친히 검열하고 공장(工匠)을 명하여 판에 새겨 돌아가신 어른을 빛나게 하였으며 또 나의 답답하게 맺혀진 한을 하루 아침에 얼음 풀리듯 하게 하였으니, 본말을 자세히 기록하여 영구토록 후세에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끝내지 못한 것은 혹시 후손이 뜻을 이어 남은 것을 수습하여 판에 새겨 전하면 『대경』과 『노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또한 천고에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경신(庚申) 3월 일 얼자(孼子) 각문지후(閣門祗侯) 세황(世黃)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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