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공도공종회
작성일 2007-01-08 (월)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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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의 학문적 세계
이인로의 학문적 세계

 이인로의 학문적 세계

1. 이인로의 생평(生平)

 이인로의 가문은 고려조 전기의 혁혁한 벌족(閥族) 명문(名門)이었다. 그가 태어난 것은 18대 의종 6년(1152)이었는데 바로 이 의종조에 발생한 무신란 이전까지만 해도 경원(慶源) 이씨(李氏)는 ‘고려조 전기 3대 가문’의 하나로, 여러 대에 걸친 국혼으로 왕가의 외척으로서의 부동의 문벌을 형성해왔다. 이인로 자신이 그의 가문을 말씀하기를, ‘나의 선조는 문장으로 세세에 이어와 홍지(紅紙) 전해온 것이 지금 이미 8장이다. (『파한집』하, 38면)’라고 하여 문신귀족으로서의 성세를 말한 바 있고, 역시 명가의 휴예인 최자도 경원 이씨의 당당한 문벌의 형세에 대해 언급하기를,
 
“경원 이씨는 개국 때부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지내오다가 장화공(章和公) 자연(子淵)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호(顥)는 경원백(慶源白)이 되었고 정(?)·의(?)·안(顔) 세 아들도 모두 재상이 되었으며 딸 한 사람이 바로 인예태후(仁睿太后)였고 나머지 두 딸도 궁주(宮主)가 되었다. 자연의 아우인 복야(僕射) 벼슬의 자상(子祥)에게는 두 아들 예(預)·오(?)가 있어 모두 재상이 되었고 그 자손이 모두 종실과 혼인하여 존귀한 외척으로서의 성세가 고금을 통해서도 비할 바 거의 없다. (『보한집』상, 64면)"라고 하였다.
  이인로는 바로 자상의 후손인데, 자상의 둘째 아들로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오가 그의 증조가 된다. 이인로는 이렇게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그 자신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가 되었는데 다행히 숙부인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켜 삼분오전(三墳五典; 유교전
적)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천분(天分)을 보여 8,9세 때에는 벌써 시재(詩才)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종 24년(1170) 그의 나이 19세 때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켜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하며 극단적으로 횡행함에 그는 피신하여 불문(佛門)으로 들어갔다가 환속하여 25세 때엔 태학에 들어가 고예(考藝)에 연첩(連捷)했고, 명종 10년(1180) 그의 나이 29세 때에는 드
디어 진사과에 장원 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1182) 최영유(崔永濡)의 금(金)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가 다음 해에 환국해서는 계양(桂陽; 지금의 부천)군 서기(書記)로 나간 것이 그의 첫 환로였다. 그 뒤 얼마 안가서 당시 재상의 반열에 있던 문극겸(文克謙)의 천
거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 보임된 이후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재직한 동안에는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마다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으므로 ‘복고(腹藁)’의 칭송을 들었다. 이때부터 임춘·오세재 등과 자주 어울려 시주(詩酒)로 상오(相娛)하니 세칭 죽림
고회를 이루었다.
  최충헌 집정하의 신종 연간에는 고원에서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천직(遷職)하였고 그 뒤 신종 7년(1204) 그의 나이 53세 때에는 맹성(孟城; 지금의 맹산) 수령으로 나가 있기도 했다. 한편 그는 신종 2년(1199), 희종 3년(1207), 강종 2년(1213) 등에 누차 최충헌의 집에 초대되어 당대의 문사 이규보 등과
더불어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또 최당(崔?) 형제 중심의 ‘기로회(耆老會)’에 참석하여 시문을 지어서 문명을 드날렸다.
  고종 초에는 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에 올랐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문장의 성세를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올라 시관(詩官)의 명을 받았으나 시석(詩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파한집) 하, 52-2면)’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고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 홍도정제(紅挑井第)에서 작고하였다.

2. 이인로의 아들과 문과급제
“내가 재주도 없이 우연히 많은 선비들의 선두를 차지했고 맏아들 정(程)은 4위에, 다음 양(讓)은 3위에, 다음 온(?)은 2위에 있어 비록 우뚝하게 두각을 나타내고 과급도 높으나 아직 뛰어나게 장원으로 뽑히어 아비와 더불어 과를 같이 하게는 되지 못했다. 고양월사(高陽月師)가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세 아들이 구
슬을 연이어 부풍(父風)을 이어받으니 선계(仙桂) 네 가지가 한 집안에 있도다.
해를 이어 황금방(黃金榜)을 차지하였으나 오히려 용두(龍頭)를 피한 것은 아버지께 사양한 때문이로다’하였다. (『파한집)하, 38면)” “본조(本朝)에서는 장원으로 재상이 된 사람이 18명인데 이제 최홍윤(崔洪胤)·금극의(琴克儀)가 이어서 이미 재상 자리에 올랐고, 나와 시랑(侍郞) 김군수(金君綏)가 함께 고원에서 벼슬했으며 그 외에 청화(淸華)한 지위에 올라 있는 사람이 역시 15명이나 되니 그 얼마나 많은가.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신 지 6년째 되던 기사년(己巳年)에 김 공이 남주(南州)의 원으로 나갈 때 제공들이 회리(檜
里)에 모여 전송하니 세상에서 용두회(龍頭會)라 하여 신선이 하늘로 오르는 것 처럼 바라보았다. . (『파한집)하, 46면)

 이상에서 그의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성사와 자신은 더욱 우뚝이 장원으로 급제한 것, 그리고 자신도 장원랑(壯元郞)으로서 뒤에 재상이나 청화한 직위에 오른 영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는 세인들로부터 존숭받는 용문(龍門) 제 1인의 문명을 차지했고 따라서 그 자신 자부도 대단했으며, 말년에 좌간의대분에 올라 시관의 명까지 받
았으나 시석을 열어보기도 전에 작고하였다.

3. 학문적 세계
  미수(眉?) 이인로(李仁老; 의종 6년 1152-고종 7년 1220)는 고려 중기 이른바 무신 집정기의 직접적인 영향권 속에서 살아간 구 문신귀족의 후예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 한시의 시론과 그에 부합된 시창작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문인의 한 사람이다. 이인로의 시론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대단한데 특히 한시
론에 있어서 이규보(李奎報)의 신의론(新意論)에 대한 용사론(用事論)을 주창하였다는 점이 우리 한문학사의 기술상에서 일찍부터 주목 받아 왔던 것이다. 현전하는 시론과 시편들을 관견하여 보면 ‘용사’에 대한 그의 강조점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시를 보는 시각이 ‘용사’에만 고착된 것이 아니
라는 점 역시 틀리지 않는 말이다. 작시론상에서 말과 뜻(생각)이 모두 오묘해야 좋은 작품이 산출된다는 것을 시종 강조한 바 있는데, 이로 보건대 신의와 용사를 변증적으로 통합한 시작품이야말로 제대로 된 것이라는 시론이 이인로의 진정한 사고였다고 해야 옳다.
  이인로는 시 창작에도 대가였다. 그의 얼자(蘖子) 이세황(李世黃)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인로 자신이 손수 편찬한 『은대집(銀臺集)』에는 부(賦) 5수와 더불어 고율시(古律詩) 1500여 수가 실려 있었으며, 또 최당(崔?)을 중심으로 기로회(耆老會)를 결성하여 음주가영(飮酒歌詠)을 일삼던 중에 지은 작품도 소위
『쌍명재집(雙明齋集)』에 다수 들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문집이 전해지지 않아 그 자세한 실상을 알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현재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동문선(東文選)』,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의 시선집과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등의 각종 필기류 서책에 다수의 작품이 실려 전하는데, 중복된 것을 빼고 보면 대략 114수 가량이 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 『동문선』에 70제(題) 80수, 『파한집』에 7수, 『보한집』에 연구(聯句)를 포함하여 23수,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僧東國輿地勝覽)』에 4수 등 도합 114수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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