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공도공종회
작성일 2007-01-08 (월)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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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駕洛國 金首露王 과 許皇玉 王后)의 후예(後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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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駕洛國 金首露王 과 許皇玉 王后)의 후예(後裔)들

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시원(始原)을 찾아서

◇ 이동호(李同浩) 인천 이씨 대총회 회장 / 가락종친회 부회장
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시원(始原)은 신비의 왕후 허황옥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모계(母系)성으로서 허씨(許氏)성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다 허왕후의 후손 허기(許奇) 께서 당나라에 사신으로갔다가 큰공을 세워 당나라 황제 현종으로부터 황제의 성(姓)인 이(李)성을사성받아 쓰게됨으로써 인천 이씨의 시원이 된 것이다.그 후손들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충절을 지키며 청청(靑靑)히 이어져와 오늘의 융성을 이루고 있다.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가락국(금관가야)은 수십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기록된 역사서와 함께 아름다운 전설, 설화를 통해 전해져 오고 있다. 오랜 역사의 흐름으로 인하여 사라져 버린 선조의 얼과 흔적을 찾기위해 목말라 하는 후손들이 역사의 파편이나 마모된 비석 하나라도 소중히 하고자 지금도 변함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락국은 낙동강 하구 기름진 김해 평야에 터를 잡고 살던 부족들이 나라의 형태를 갖춘 것은 서기 42년(신라 유리왕 19년)이었다.
각 부족의 (9간)대표들이 김해의 구지봉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왕)을 모시기 위해 하늘을 향해 제례를 올리던 중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와서 함께 달려가 보니 광채나는 금합(상자)에 여섯 개의 알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속에서 여섯 동자가 나왔는데 그중 맨 처음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을 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시다. 김수로왕이 즉위한지 7년(서기 48년)되는 해인 7월 27일. 중신들이 대왕께 조알(朝謁)하고 아뢰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시지 못하였으니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처녀를 간택하여 왕비를 삼으소서” 하였다. 그러자 대왕께서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거니와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인즉 경들은 염려마시오” 그러던 어느날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해변에 이르고 있었다. 그 배에는 20여명의 신하와 노비 그리고 금은 보석을 잔뜩 싣고 배안에는 공주가 타고 있었다. 정중히 영접하고 공주를 비(妃)로 맞으니, 당년 16세의 아름다운 처녀 허황옥인 것이다. 허황옥은 아리땁고 가녀린 여성임에도 일국의 공주로서의 의연함과 품위를 잃지 않는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육지에 닿자마자 높은 언덕에 올라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으며 가져온 화려한 비단, 금은 주옥 패물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귀한 왕실의 공주로서 부왕의 명에 따라 가락국으로 보내어진 천사같은 분이다.

◇ 시조공의 묘소 - 신도비 원인제
수로왕의 정중한 영접을 받은 공주는 비로소 말문을 열고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許)씨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인 지난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으로서 아직 나라를 다스림에 군왕으로서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너는 곧 부모를 떠나 그곳으로 떠나거라’ 하여 부모님을 떠나 이곳에 왔으니 이제사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수로왕은 “나는 나면서부터 사못 성스러워 공주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오.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거절하였으니, 이제 공주께서 스스로 오셨으니 이몸은 행복하오” 이상이 수로왕과 허왕후가 만나는 사랑의 서막이다.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 이래 최초의 국제적인 결혼과 만나게 된 동기 등이 신비에 쌓여 있어서 후손들의 관심과 세인의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후 두분은 금슬이 좋아 10名의 왕자와 2名의 공주를 두고 백년해로를 하였으니 세기의 사랑이 남긴 아름다운 역사인 것이다.

인천 이씨 (仁川 李氏)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허왕후(許王后)의 후손으로서 2000년의 세월 속에서도 왕족의 역사를고스란히 간직한 귀족의 성으로서 모정의 위대함을 전하고 있다.

허황옥은 당년 16세의 어여쁘고 가녀린 여성이었지만 이만리 험한 바다를 건너 이국땅 김해까지온 여정을 생각해 보면 매우강인한 여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어린 나이지만 흔들리는 기색도 없이 당당히 자기를 표현하는 대담성과 총명함을 볼 수 있다. 본인은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라고 밝히는 영민함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한마디로 들릴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문화와 배경을 상상할 때 우리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수밀도 같은 피부, 낭낭한 목소리로 자기를 정확히 소개하는 모습을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상상해야 할까?
수로왕과 혼인 후에 10분의 왕자와 2분의 공주를 두신 것은 그 당시 최고의 덕목인 다산과 축복이었다. 하루는 허왕후가 수로왕에게 청하기를 “첩이 하늘의 명(命)을 받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먼 바다를 건너와서 대왕(大王)을 모시었으니 첩은 동토(東土)의 객(客)이온데, 첩이 죽은 후에 저의 성(姓)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하니 수로왕이 어여삐 여겨 두아들로 하여금 허씨 모성(許氏 母姓)을 따르게 하였다. 이것이 허씨(許氏)의 시작이 되었으며 세세손손 그 피를 이어오게 된 것이다. 첫째 왕자는 왕위를 계승하고 두 왕자는 어머니 허씨의 성을 따라 어머니가 허씨임을 후대에 알리고 머나 먼 외국에서 왔음을 세세토록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흔적을 남기는 지혜로움을 후손들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모계성을 쓰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허씨(許氏)는 김수로왕과 허황옥왕후의 두왕자에게 허락한 최초의 모계성으로서 왕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귀족의 성이다. 역사는 흘러 수로왕의 10세손 양왕(讓王)은 싸움없이 나라를 신라에 맡김으로써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후 테후의 후손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에 배치되어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신라에서 대활약을 하게되는 가락의 왕손들. 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기원을 이루는 계기가 태동된다.

가야국이 신라에 합쳐짐에 따라 신라는 갑자기 국력이 신장되어 고구려 백제와 영토를 다투게되고 급기야는 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큰공을 세운 흥무왕 김유신(金庾信)장군은 가야국 마지막 왕의 증손(曾孫) 으로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더불어 신라의 화랑이 되었으며 진덕여왕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이찬 김춘추를 추대했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자 김유신장군의 여동생 문명은 자연스럽게 왕후가 되었으며 그 사이에서 문무왕(文武王)이 탄생, 삼국통일대업을 마무리 지었다. 이같이 가야인들과 가야계는 신라에서 최고의 권력의 중심에서 대활약을 하였으며 가야계는 신라계와의 버금가는 실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가야는 신라와의 전쟁으로 인한 패망이 아니고 합병의 형식을 취했기에 가야인 또한 굴종의 민족이 아닌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가야의 왕족과 신라의 왕족이 통혼하게 되었으며 가야의 인재를 등용하게 된 것이다. 김해 김씨의 중시조인 김유신 장군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야심을 여지없이 꺾어 그들을 대동강 북쪽으로 내칠수 있었던 것은 가야계의 큰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가야 왕족 출신의 허기(許奇)공이 6두품인 아찬에 오르게 되었고 신주(信州)에서 전방 최고 사령관(兵馬使)으로 활약하고 있던 중. 당나라에서는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켜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을 점령한 후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여세를 몰아가고 있었다.
당의 현종은 당황한 나머지 내륙인 서촉(현 成都)으로 피난하며 중국(나라)은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신라 경덕왕은 국경 최고 사령관인 아찬 허기(許奇)를 급히 사신으로 파견하여 현종을 돕게 하였던 것이다. 해가 바뀌어 안록산의 반란이 패배로 끝나자 당나라 현종은 친히 호종(扈從:왕을 모시고 따름)한 공로로 황제의 성인 이(李)와 소성백(邵城伯)의 작(爵)을 하사하였으며 신라 경덕왕에게 내리는 오언시(五言詩)를 가지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소성백 허기(邵城伯. 許奇)를 인천지방장관(城主)으로 삼고 그곳의 지명을 미추홀(彌鄒忽)에서 소성(邵城)으로 바꾸어 당나라 황제의 뜻을 존중하였으며 그 자손들이 대대로 작위를 세습케 하였다. 이는 신라 경덕왕이 당(唐)의 봉건제도(封建制度)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후일에는 지명(地名)을 한자 지명으로 바꾸면서 중국 지명을 빌려 사용했으며 관직명(官職名) 또한 당을 따라 변경했던 것이 그 증거인 것이다. 그 당시 소성(邵城:인천)은 중국과의 외교사절 교환과 교역의 통로였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국방기지로서 충남의 태안반도 이북의 해상이 모두 소성백 이기(李奇)의 관할 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이는 전방 최고 사령관인 병마사(兵馬使) 대광(大匡) 소성백 이기(李奇)를 소성(邵城)의 장관(長官)으로 임명한 것을 보아도 당나라와 외교사절이 왕래하는 통로에다 황제의 성을 하사받은 소성백의 자손을 둠으로써 외교적 실리를 얻고자 하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소성백의 후손이 소성에서 여러 대를 살아오는 동안 신라는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왕족 간의 골육상잔과 기강의 해이·정치문란·관리의 부패·잦은 반란 등으로 왕권이 쇠약해져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줄어들면서 지방 수령의 세습화 사유화로 인한 호족 집단이 생기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인천 이문(仁川 李門)은 인천 지방의 지배 귀족계급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지키면서 신라 왕실과의 교류를 돈독히 하였으며 최고의 담보이며 신뢰인 통혼도 자연스럽게 하였던 것이다.

 
◇ 시조공 춘향대제
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시조 소성백(邵城伯) 이허겸(李許謙)의 세계(世系)가 새로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역사는 흘러 부패와 무능의 신라는 막을 내리고 고려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다. 호족 세력을 배경으로 궁예를 추방하고 왕위에 오른 태조 왕건은 전쟁없이 통합한 신라와 신라인에게 우호적이었다.
가락국의 후손이며 신라에 크게 공헌한 소성백. 이기(李奇)의 작위를 계승한 10세손 소성후(邵城候) 이허겸(李許謙)은 고려에서 대고관이 되어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손녀인 경주 김씨를 배위(부인)로 맞아, 한(翰), 눌(訥), 두분의 아드님과 딸로서 안효국 대부인(安孝國 大夫人)을 낳았다. 장자 한은 현재의 장관급인 중추부사(정3품) 지냈으며, 사후에는 사공(司空:정1품) 태자태보상서좌복야(太子太保尙書左僕射)의 높은 벼슬과 안경공(安敬公)의 시호를 받았고, 차자 눌은 대장군(大將軍:종3품)이었으며, 따님 안효국 대부인은 사공. 김은부(司空 金殷傅:정1품)가문에 출가하여 3분의 따님을 두었는데 3분 모두 고려 8대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현종(顯宗)은 처외조부인 이허겸에게 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 식읍일천오백호(尙書左僕射上住國 邵城顯 開國後 食邑一千五百戶)를 추증함으로써 인천 이문(仁川 李門)이 한 문벌(門閥)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천 이문의 시조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인천 이씨를 빛낸 많은 분들 중에 소성후 이허겸의 장손인 장화공 이자연(章和公 李子淵)을 꼽을 수 있다. 이자연은 뛰어난 인품과 탁월한 능력으로 조정을 이끌었으며 문물제도 정비와 왕실의 안정을 꾀하였으며 역대 4분의 왕을 모실 정도로 훌륭한 분이였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에 식읍 삼천호(食邑 三千戶 식읍: 영지로서 고려시대에 왕자, 왕척, 고위관원 중에 공이 있는 자에게 땅을 주는 제도)를 받았고 사후에 중서령(中書令)에 장화(章和)의 시호 익(謚)을 받게 된다.
장화공 이자연 이야말로 인천 이문이 고려의 많은 벌족 중에 최고의 세를 떨친 벌족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묘지명(국립박물관 소장)은 수십세기가 흐른 지금도 애석함으로 전하고 있어 마지막 부분만 새겨 보고자 한다.
“슬프도다 하늘에 물을 길 없고
계림(계림:훌륭한 사람을 칭함)이 갑작스레 꺾인 일 마음 아프구나.
언덕이 옮기고 골짜기가 변해도 지석(誌石)만은 보존되겠지. 눈처럼 희고 난초처럼 향기로우니 명성은 영원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번성하여 고려 8대 현종 임금 이후 17대 인종 임금까지 모두 10분의 왕비를 냈으며 그 왕비들의 소생으로 다섯 분의 임금(순종, 선종, 헌종, 숙종, 인종)과 11분의 왕자와 6분의 공주가 탄생하였으며 외손으로 왕비에 오르신 분이 3분으로 그분들을 통해서 탄생시킨 임금(덕종, 정종, 문종)이 3분이나 되며, 11분의 왕자와 공주이면서 왕후가 되신 4분의 공주(인형왕후, 효사태후, 경화왕후, 문정왕후)를 모두 치면 서기 1009년부터 1146년 사이에 137년간 인천 이씨 일문과 연관을 갖지 않은 왕은 없었으며 인천 이씨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국교인 불문에 들어가신 분을 제외하고는 많은 분이 벼슬에 올라 3세에서 6세까지 4대에 걸쳐 출생한 49명 중에서 6분이 불가에 귀의하시고 나머지 43분중 18분이나 재상에 오르는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겼으니 그분들의 면면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음이 참으로 아쉽다.
이렇듯 인천 이씨는 고려 초부터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 가문인 안산 김씨,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광산 김씨, 해동공자 최충의 해주 최씨, 윤관 장군을 배출한 파평 윤씨, 강능 김씨, 문한가 (文翰家 : 글잘하는 사람 )로 이름을 날린 평산 박씨 등과 혼인을 통하여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날로 번창하였으니 당시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 (庭下芝蘭三宰相 文前桃李十公卿) 뜰 아래 난초는 3재상이고 문앞에 도리(桃李)는 10공경일세( 芝蘭과 桃李는 자손 또는 형제를 말함)라고 시를 지어 축하할 정도였다. 또한 학행, 문장, 외교로 인천 이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예종조때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大樂署丞)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춘천의 청평산에 들어가 소식포의(蔬食布衣:나물 먹고 베옷 입고)하면서 선학(禪學)의 연구로 평생을 바친 청평거사(淸平居士) 진락공 이자현(眞樂公 李資玄)은 예종의 간곡한 부름에도 강(임진강)을 건너지 않았고 세속의 영화에 초연하였으니 후에 조선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은 그의 고절(高節)을 찬양하였다.
쌍명제 이인로(雙明齊 李仁老)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주자(朱子: 중국 송대의 철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를 뵙고 학문의 요령을 배웠으며 은대(銀臺) 쌍명(雙明) 파한(破閑) 등의 문집을 셋이나 남긴 문장가로 나라 안팎에서 이름을 드날렸으며 문진공 이장용(文眞公 李臟用)은 고종(高宗)과 원종(元宗)을 섬겨 정당문학 중서시랑 태자대부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는데 문장이 뛰어나 한시대의 큰글이 그의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그는 몽고와의 승산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왕과 권신들의 주저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원종의 원나라행을 성사시켰으며 자신이 직접 임금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와 독대하여 정정당당하고 의연하게 고려의 입장을 밝혀 당시 전쟁 종식의 장애가 되었던 출육(임금의 거처를 강화에서 개성으로 옮기는 것) 문제를 해결하였고 원나라가 요구하는 조공(군량미 병마)을 덜게함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궁핍한 백성을 구하는데 크게 기여한 공의 높은 애국심과 깊은 학문, 고매한 인격은 원나라 황제(세조)와 대신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존경을 받아 원의 황제는 공을 위하여 두차례나 연회를 베풀 정도였다. 연산군 원굉(連山君 元紘)은 시에 능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의 문관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따님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었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충절을 지켜 신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협조하지 않은 불사이군의 충신이었다..
공도공 이문화(恭度公 李文和)는 어릴 때 이미 대인의 기상이 있었으며 율정(栗亭) 윤택(尹澤) 선생에게 사사하고 양촌 권근(陽村 權近) 선생과 종유(從遊: 따르며 같이 지냄)하면서 우왕 6년에 장원급제하여 고려에 벼슬하였으며 맹사성 황희 등과 같이 고려 유신들이 조선 왕조를 돕도록 한 젊은 인재 가운데 한사람으로 형조판서, 의정부 좌참판,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온 조정이 추앙하는 바 되었고 영의정의 증직과 공도(恭度)의 시호를 받았다.
아들 6명이 모두 재상(宰相)의 자리에 올라 큰일을 하였으며 그의 외손녀가 세조의 등극으로 왕후가 된 정의왕후 윤씨 였다.
이상과 같이 고려와 조선에 걸쳐 인천 이문은 국내 굴지의 명문거족이었으며 대를 이어 나라에 공헌한 귀족의 가문이었다.

◇ 원인제에서 족보 편찬중인 종인들.
영욕(榮辱) 뒤안길에 선 인천 이문(仁川 李門)의 갈등과 고뇌

로마가 하루 아침에 망하지 않음과 같이 인천 이문도 140여년의 영광과 풍요 속에 가문을 이어왔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릴 수가 없었다. 명문벌족 왕손의 가계로서 찬란한 꽃을 피웠던 영광의 자리는 기나긴 권력의 핵심을 누림으로써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었고 정중부의 정변으로 인한 문신 탄압, 몽고군에 의한 무차별한 살육의 중첩으로 많은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무신이 정권을 잡고부터 왕은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했으며 문신으로 명성을 드날리던 분들의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명문세가의 자손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무신들과 어울리며 적당히 타협하고 복지부동하면서 자리만을 보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찌 부러질지언정 휠수야 있느냐며 지조를 지킨 것이다. 정중부에게 쫓겨난 의종(毅宗)의 복위운동에 부수상(평장사)이던 지무(之茂)가 연루되어 있었던 것도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겠지만 이로 인하여 인천 이문은 조정을 멀리 하게 되었으며 무신들의 횡포와 몽고군의 40년 간의 찬탈로 인하여 나라는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자신의 근본(뿌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전쟁의 참상을 한마디로 대변하고 있으며 인천 이문(仁川 李門)도 많은 분이 흩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인천이씨의 갈래에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줄기를 찾지 못하다 보니 새로운 관향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니 고려 말경에 새로운 이씨가 생긴 것 등은 인천 이문의 끊어진 뿌리를 설명함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 이문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역사에 뚜렷한 분은 지화(之和)祖의 (시중공파), 문정공 지저(之低)祖의 (공도공파), 백선(伯仙)祖의 (쌍명제파), 징옥(澄玉)祖의 (충강공파) 네분이며 나머지 14분은 모두 어찌하여 손을 남기지 못하고 대가 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후손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 보았을 것이다.

인천 이씨는 이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우리 민족의 성씨로서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서 애국충정의 길을 걸어온 명문거족이었다.

인천 이씨는 가락국의 후예로서 김해 김씨 허씨와는 한뿌리로서 가락종친회를 형성하고 세성(三姓)이 다함께 서로의 행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해마다 김해에서 봄 가을에 열리는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춘추시향대제에는 꼭 함께 참석하여 우의를 돈독히 하고 있다. 세인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앞에서 기술했지만 너무나 긴 역사의 변천에 적응해 온 가문이어서 김씨가 허씨로, 허씨에서 이씨로 바뀌어진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어려워 질때가 많았으리라 생각하며 거주지를 관향으로 삼는 관행상 인천의 옛지명을 따라 소성, 경원, 인주, 인천으로 바뀌어지는 과정 또한 길기 때문이다. 인천 이씨는 가락의 왕손(王孫)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항상 역사의 전면에서 당당히 살아온 이천년의 명문벌족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제 그 후손들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있으며 오늘날 또다시 권토중래의 꿈을 안고 날로 번창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그 옛날의 영광이 도래할 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 이씨의 시조 소성백 이허겸(李許謙)의 묘소는 인천시 문학산 남쪽 간치도 신기리 (현:연수구 연수2동) 에 있다. 산수가 아름답고 바닷물이 감도는 섬에다 모셔진 것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거북이형이어서 후손들이 번창하는 명당 중에 명당으로 꼽고 있으며 천년의 세월을 이기고 그 자리에 보존되어 있는 것만으로 후손들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고 있다. 인천 이씨 대종회 이동호 회장님은 시조 묘역에 건축한 재각인 원인재 낙성식 축사에서 지금 우리나라에 600여개의 성씨 중에서 시조가 누구인가를 아는 성씨가 100여개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도 시조묘를 보존하고 있는 성씨가 10여개 밖에 안된다고 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남달리 뛰어나 영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소년이 청년이 되어 명문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평소 증조부로부터 뿌리에 관한 말씀과 가락의 왕손이라는 말씀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중 평소에 동경하던 시조묘를 찾아 나서게 된 때가 1956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생 시절이었다.
시조묘에 절을 올리고 주위를 살피니 비석은 이끼가 까맣게 끼어 글씨의 형체를 알 수 없었고 담장도 없어 사람과 짐승이 마구 오르내릴 수 있는 형세였다.
그 이후 대학시절은 물론 직장생활 중에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의문이 들 때면 시조묘를 찾아가곤 했다. 시조묘는 결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시조묘 앞에 서 있노라면 조상의 자취를 느낄수 있고 증조부님께서 말씀하셨던 뿌리를 생각하며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는 계기로 삼게 되었다. 그 꿈 많던 청년이 진급을 할 때나 이동이 있을 때는 꼭 시조묘를 찾아서 시조 할아버지께 고유(告由;조상께 보고 드림)하는 일을 빠지지 않는 남다름을 엿볼 수 있으니, 그 분이 바로 관세청장. 재무부차관. 산업은행 총재. 충북도지사.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이동호 대종회 회장인 것이다. 높은 공직에 있다 보면. 시간을 쪼개 써야하며 촌각을 다툴 때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숭조정신(崇祖精神)으로 고유하는 것을 후손들은 본받아 행해야 할것이다.
이제 인천 이씨의 시조묘는 선대 대종회장님들과 간부 종인들의 노력으로 800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재실을 지어 인천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지하철이 개통됨에 따라 지하철역명이 원인재역으로 명명되어 하루에도 수백번씩 원인재역을 안내방송 하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노고와 마음조림이 눈녹듯 사라지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역사상 시조묘를 지방문화재로 성역화 하고 그 언저리를 공원으로 지정하여 영구 보존키로 한 것은 전무후무한 영광인 것이다.
이제 인천 이씨의 시조 재실인 원인재 (각파가 인천에서 뿌리를 내림)는 인천 이씨만의 재실이 아닌 국민 모두의 사랑과 추앙을 받는 유적으로 조상 숭배의 참뜻과 역사를 배우는 도장이 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천 이씨 대종회(회장 이동호)는 해마다 여름방학을 맞아 인천 이문의 대학생(신입생)을 선발하여 3박4일간의 합숙을 하며 뿌리에 관한 교육과 예절을 가르치고 있으며 조상님에 관한 역사적인 공부뿐만 아닌 제복을 입고 묘소참배 하는 법, 제례법 ( 祭禮法: 제례의 절차와 방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타성(他姓)의 사람들도 배워야할 덕목이며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번성할 수 밖에 없는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에필로그-
인천 이문(仁川 李氏의 家門)을 취재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된 것은 선조님들의 훌륭한 업적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인품과 정신이 남달랐던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하지 않는가. 고려의 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이조 말에 이르기까지 천년 역사의 중심에서 나라의 융성을 위해 크게 활동을 하게 된 것은 학문이나 지혜가 남보다 뛰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른들을 한분 한분 모셔서 새롭게 조명하여도 한권의 책을 쓸 수 있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천년 역사를 이어온 어른들을 주마간산격으로 조명하다 보니 훌륭한 어른들에게 누를 끼치는 게 아닌가 하는 송구스러움을 느낀다.
인천 이씨에 대하여 세인(世人)들이 잘 모르는 것은 인주 이씨는 명문벌족이며 훌륭한 가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인천 이씨를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후손들이 풀어야할 과제인 것이다.
시청앞 덕수궁 정문 옆에 자리잡고 있는 오천회관(烏川會館, 현: 팰리스빌딩)은 공도공 이문화(恭度公 李文和)공의 아호인 오천(烏川)을 따서 사용하는 것이다. 인천 이씨 가문에 공도공의 후손이 가장 많이 번성하여 전체의 80%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 이씨의 후손들은 이나라 근세사에도 큰 활약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국가 동력의 근간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대종회장을 맡고 있는 이동호 박사님은 남다른 숭조애친(崇祖愛親)의 정신으로 종인들의 뜻을 모아 대종회를 잘 이끌고 있으며, 화려한 이력과 경력을 가졌음에도 언제나 겸손으로 일관하며 종사에 관한 일이라면 발벗고 뛰었으며. 원인재의 건축에 관한 일화는 지금도 종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교육부총리를 역임하고 현 성신여자 대학교 총장인 이상주박사는 대학자로서 교육행정가로서 이나라 미래를 위해 수고하고 있으며, 경찰총수로서 이나라 치안을 담당했던 이무영 전 경찰청장은 많은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퇴임 후에도 많은 이로부터 추앙받고 있다.
인천이씨 대종회는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있지만(2004年 6月 11日) 대종회의 회식에 참여하신 분들의 면면을 보면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 (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이영권 동남보건대학장 (전 국회 교육분과위원장), 전 장유업협회 회장으로 대종회 명예회장인 이남호(南浩)님, 의당복염 장학재단 이사장 이근필(根弼)님, (주)시네마에버그린스 회장 이갑상(甲祥)님, 국회사무차장을 지내고 연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계신 정치학박사 이재도(在都)님, 종친회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있는 공도공파 회장 진화(進化)님, 씨족사에 밝은 부회장 이규복(逵復)님을 비롯하여 많은 분이 참석하였으며 대종회의 모든 업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 총무이사 이도하(道夏)님의 친화력이 모든 종인들이 오천회관을 편하고 쉽게 오갈 수 있도록 수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인천이문의 후손으로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애쓰는 모든 분들에게 세세생생(世世生生) 무궁한 발전과 인천 이문(仁川 李門)의 영광이 있기를 기원해 본다.
취재 _ 이평제 기자

2004-07-09 12: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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