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공도공종회
작성일 2007-01-08 (월)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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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특집 - 한국의 뿌리
이만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한가위 특집 - 한국의 뿌리

 


인천이씨(仁川李氏)의 뿌리교육은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며 투자이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긴 역사의 굴절 속에서도 고절(鈍?을 지켜온 명문벌족으로서 선조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 시키는데 큰 뜻을 두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존하는 자신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진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철학적 종교적인 차원의 질문을 하여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인류는 역사를 통하여 조상들의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으며 교훈을 얻고 미래를 설계한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 줄 것인가.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저들이 살아갈 터전 위에 조상의 숭고한 얼과 정신을 물려주는게 최고의 덕목이 아니겠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이 살아갈 한 뼘의 땅도 없이 세계를 유리방황하며 온갖 수모와 학살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맥맥히 질긴 생명을 유지하면서 지금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의 정신 속에는 여호와로부터 특별히 선택되었다는 선민의식과 다시 올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과 삶의 모든 규범을 담은 탈무드의 교본이 저들에게 끈질긴 생명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에도 뿌리의 중요성과 조상님의 거룩한 정신을 담아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계승하는 성씨 인천이씨(仁川李氏)가 있어 타 성씨와 가문들에 귀감이 되고 있어 이를 소개 하고자 한다.
인천이씨 (대종회 회장 李同浩 경영학 박사) 는 시조(始祖)로 부터 지금까지 긴 역사의 굴절 속에서도 고절(高節)을 지켜온 명문벌족으로서 선조의 큰 뜻과 교훈을 후손들에게 바르게 계승시킴으로써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자부심을 일깨우고 잊혀져가는 뿌리에 대한 개념을 바로 세우고자 일찍부터 뿌리에 관한 자료와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뿌리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천삼백 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왕족으로서 아득한 원대의 뿌리는 가락국의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인 허황옥의 후예(後裔)로서 10명의 왕자 중에 두 명(둘째와 셋째)의 왕자에게 허황후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의 성(姓)을 따르게 하였으니 그 후손들이 허(許)씨 성을 쓰게 되었으며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김해(金海)등으로 관향(貫鄕)을 달리하고 있으나 모두가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후의 후손들이며 고려 중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출(傑出)한 인재(人才)를 많이 배출한 명문벌족(名門閥族)이었다.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가야계(伽倻系)로 전하고 있으며 신라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으로 계신 기(奇)께서 서기 756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에 당나라에서는 안록산(安祿山)의 반란으로 당나라 현종은 서촉(현:成都) 으로 피란하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때에 신라의 사신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양자강을 거슬러 성도(成都)에 이르러 현종을 호위하고 환도(還都)를 도움으로써 이를 가상히 여긴 당나라의 현종으로부터 시서(詩書)와 황제(皇帝)의 성(姓)인 이성(李姓)을 사성(賜姓) 받아 무술(戊戌)년에 환국함에 따라 신라 경덕왕은 친히 공을 높이어 (功高親書)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戶)를 봉(封) 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인천 지방에 세거(世居)하면서 토호문신세력(土豪文臣勢力)으로서 복록가문(福祿家門)의 영달을 누리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10대인 허겸(許謙)공을 기일세조(起一世祖)로 하여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의 본관(本貫: 貫鄕)조로 삼으니 본관도 지명에 따라(소성:邵城.경원:慶源.인주:仁州.인천:仁川) 바뀌어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분이 고려 현종 15년 서기 1024년에 증(贈)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侯)에 추증(追贈)된 이허겸(李許謙) 시조공 이며 그 후손들이 고려를 반석 위에 세웠으며 140여 년간 왕손의 가계를 이으며 찬란한 꽃을 피웠다. 무신들의 반란(정중부의 난) 으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으나, 역사는 바뀌어 이씨조선 500년 역사의 전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지금의 시중공파(侍中公派), 공도공파(恭度公派),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충강공파 (忠剛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 공도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그 후손들이 인천 이씨의 80 %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뿌리 교육은 여름방학의 시작과 함께 당해에 대학을 입학한 신입생 중에서 각 종파에서 선발된 학생들을 모아서 3박 4일 간의 일정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선조님들에 대한 역사적인 공부와 살아온 삶의 터전, 사당, 서원, 묘소를 참배하는 순서로 현장교육과 답사하는 프로그램이 짜여 있으며 이 교육을 통하여 생면부지의 대학생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우애를 다지는 귀중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선 전국 각 지파의 인솔 책임자가 파별로 학생들을 인솔하여 오후 2시까지 시조 허겸(許謙)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 원인재(源仁齋 : 인천지방문화재. 연수구 연수2동) 에 모이게 된다. 인원 점검과 각자의 인적사항과 사진이 첨부된 명찰이 교부되고 상견례(相見禮)가 끝나고 의당복염장학재단에서 선발한 洋剋卉?인천이씨 대학생에게 동 장학재단이사장이자 인천이씨대종회 고문으로 있는 90고령의 이근필씨가 직접 격려와 함께 장학증서를 수여하자 긴장했던 剋壎湧?할아버지 집에 온듯 편안과 안식을 느끼며 핏줄의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전혀 알지 못하는 친구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생면부지의 친구들이 타인이 아닌 일가로서 옆자리에 있지 않는가. 오후 3시가 되자 본격적인 뿌리교육의 막이 오르고 종중의례에 따라 가락국의 김수로대왕과 시조공에 대한 예를 올리고 이어 내무부장관, 재무부차관, 충북도지사, 관세청장, 한국산업은행총재, 은행연합회회장,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대종회 회장 이동호(李同浩) 경영학박사의 훈화가 시작되자 학생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생기로 빛나고 경청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엄숙해 진다. 학생들을 향한 말씀에서 “대학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우리의 미래인 여러분과의 만남이 얼마나 반갑고 기쁜 일인가로 말문을 열고 만물이 뿌리의 유전으로 종족보존(種族保存)을 꾀하고 있으니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으며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다 하더라도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와도 근본을 알면 쉽게 해결되고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잎이 무성하듯이 선조의 행적을 알면 내가 하고자 하는 목표를 쉽게 이룰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혈족의 진한 응집력이 큰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둥인 대학생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인 이 자체가 촉진제가 되어 끊임없는 교류와 만남으로 뿌리는 더욱 깊어 질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늘의 만남이 시발점이 되어 지구촌 어디에서든지 돈목(敦睦)과 화합(和合) 으로 문중(門中) 의 번성에 도움이 되는 많은 교류를 당부” 하며 훈시를 마치자 학생들은 자신감을 찾은 듯 힘찬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 이명환 상근부회장의 제례의 종류와 순서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질문이 이어지고 제례의 깊은 의미와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형식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진리를 깨닫는 표정이 된다. 이어 제복으로 복장을 갖춘 후에 원인재 경내에 모셔져 있는 시조(許謙 : 高麗國 尙書左僕射 上柱國 邵城伯)의 묘소에 들려“ 할아버지 저희들이 왔습니다. 하고 예를 갖추고 잔을 올리며 시조할아버지의 크신 뜻과 바람을 저희가 이루겠습니다. 그동안 철이 없어 오지 못했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다는 다짐을 하는 고유제를 올렸다. 이어서 학생들과 대종회 어른들이 어우러져 기념촬영을 하였다. 오후6 시가 되자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인 이만열 박사 (34世. 국사편찬위원장. 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가 ‘인천 이씨의 유래’ 를 강의하자 열기가 넘쳤고 호기심과 진지함이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환영과 만남의 기쁜 잔을 들고 미래를 다짐하는 축배를 통해 우리는 한 가족 한식구임을 재확인
저녁 7시가 되자 시장하고 출출한 학생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인천을 출발하여 서울시청 앞 덕수궁 정문 옆에 있는 인천이씨종친회 소유 팰리스빌딩 (오천회관(烏川會館)) 2층에 있는 레스토랑 싸브궁싸브가에서 원로 종친들이 베푸는 만찬이 이루어 졌다. 학생들은 기쁨과 감사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연속이었다. 밤 9시가 되자 인천이씨 중앙청년회가 주관하는 환영의 밤 행사를 팰리스빌딩 5층 메드독스 호프집을 전세 내어 환영과 만남의 기쁜 잔을 들고 미래를 다짐하는 축배를 통해 우리는 한 가족 한식구임을 재확인 하는 즐거운 환영의 밤이었다. 밤이 깊어 11시, 명멸하는 네온의 불빛이 온 시가지를 덮은 서울의 야경을 관광하고 발길을 인천의 원인재로 돌려 빡빡한 첫날의 스케줄을 마치고 원인재 시조 할아버지의 품에서 첫 밤을 자게 됐다.
이름 모를 새소리가 원인재의 아침을 깨우고 곤한 잠에서 일어난 학생들은 7시에 아침 식사가 끝나자 수료식을 하고 짐을 챙겨 각 종파별로 중시조를 찾아 나섰다 그중 주종을 이루고 있는 공도공파를 추적하였다.
버스에 몸을 싣고 공도공 할아버지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 천안으로 향했다.

천안의 오천재에 도착하여 공도공 할아버지께 고유제를 올린 후에 신도비 관람과 기념촬영을 마치자 34世 명환 강사는 공도공 할아버지(文和)의 걸어온 발자취를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하였다. 공도공(恭度公) 은 고려 공민왕 7년(1358년)에 시조공의 14세손으로 탄생하였으며 얼굴이 준수하고 천품이 온화(溫和) 하여 어렸을 때부터 의젓하고 대인의 기상이 넘쳤으며 총예 영민하여 글을 배움에 학업이 날로 진취되어 공의 나이 23세에 최고의 영예인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최우수 합격) 하여 문학대천(文學大闡)의 기풍을 세상에 떨친 어른으로서 목은(牧隱) 이색이 장원시를 지어 공의 깊은 학식과 기상을 칭송해 주었으며 율정(栗亭) 윤택(尹澤)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때로는 목은(牧隱) 포은(圃隱) 두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추종했으며 그 당시 명현(名賢)인 권근(權近)과 이숭인(李崇仁) 김자수(金自粹)와도 서로 벗 삼아 강론(講論)하였기에 문장(文章)과 경술(經術)이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공은 태조(太祖)가 고려를 혁명할 때 많은 인재(人材)들이 임금을 도와 왕업(王業) 을 튼튼한 기반 위에 세워 국기(國基)를 다져야 할 때에 공도공은 태조(太祖) 의 옛 친분으로서 요직(要職)에 발탁되어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등의 세 임금을 섬기는 탁월한 신임과 충정으로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는 공을 세운 것이다.
특히 내직(內職)으로 대사헌(大司憲)과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육조(六曹)의 예조(禮曹) 형조(刑曹) 호조(戶曹)의 판서(判書)와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등 재상(宰相)을 10여 년간 지내면서 유학을 튼튼히 하여 조선조의 문치(文治)를 크게 일으킨 명신이셨고 1414년(太宗 14년)에 향년 57세로 서거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3일간 조회(朝會)마저 중지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의 증직과 공도(恭度)시호(諡號)를 내렸으며, 묘소는 현재의 삼성동 선능(成宗王陵) 명당 자리였으나 1494년 성종(成宗)이 승하하자 묘자리를 성종에게 양보하고 광주 경동(현재 서울의 청담동, 학동, 삼성동)으로 이장 하였으나 광복 후 서울시에 편입됨에 따라 도시개발에 밀려 1974년 신해(辛亥)년에 유산(遺産)으로 천안시 구성동 건좌(乾坐)에 이장함과 동시에 오천재(烏川齋)를 이곳으로 이건 확장하여 길이 유지하고 서울 덕수궁 옆 빌딩을 구입, 할아버지의 호를 따라 오천회관(烏川會館)으로 이름 짓고 후손들이 이곳에서 종사(宗事)를 논의하고 있다. 라고 강의를 마치자 학생들은 이렇게 훌륭한 할아버지의 업적과 충정을 배우게 됨에 자부심을 느끼며 인천이씨의 후손으로서 본받아 행할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다짐하는 결의가 엿보였다. 바쁜 스케줄이 아니라면 공도공 할아버지의 재실에서 며칠을 보내며 많이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만 시간에 쫓겨 11시가 되자 학생장이 차타기를 재촉하고 오천재를 출발,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공도공(恭度公) 휘 문화(文和) 의 후손들의 세거 지를 돌아보면서 흐르는 역사 속에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배우게 된다.
공도공(恭度公) 슬하에 6남3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재상(宰相)의 자리에 올라 가문을 크게 빛내었으니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인천 이문의 대종(大宗)을 이루게 되었다.
장남 효인(孝仁)은 한성부윤,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대구에 터를 잡아 영남지방에서 큰 활약을 하며 대구 종중을 이루게 되었고, 차남 효의(孝義)는 공조판서 삼군 진무사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경남 함안에 터를 잡아 함안 종중을 이뤘으며, 삼남 효례(孝禮)는 예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충남 청양에 터를 잡고 청양종중을 이루었고, 사남. 효지(孝智)는 동지영부사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전남 장흥에 장흥 종중을 이뤘으며, 오남. 효신(孝信)은 판돈영부사와 호조,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경북 김천에 터를 잡아 금산 종중을 이뤘으며, 육남 효상(孝常) 은 지돈령부사와 자헌지동영부사를 지냈으며 후손들이 경주에 터를 잡아 경주종중을 이루게 되었으며, 장녀는 윤번(尹 )에 출가하여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이며 세조왕비(世祖) 인 정희왕후(貞憙王后)를 탄생시킨 흥영부대부인 이시다. 이렇듯 공도공(恭度公) 의 후손들이 삼한 각지에서 선조님의 대를 자랑스럽게 이어오고 있으니 뿌리교육에 임하는 대학생들의 각오 또한 단단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며 선조님의 유적과 묘소를 일일이 탐방함은 시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먼 거리는 교재로 대신하고 우선 천안에서 가까운 염수재(念修齋)를 향해 차를 달려야 했다.

염수재란 “그대는 선조를 생각지 않는가? 힘써 덕을 닦으라”
염수재(念修齋)는 삼남 효례(孝禮)선조 묘소가 한강 동쪽에 있었으나 여러 차례 전란의 와중에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으며 도시 확장 구역에 포함되어 있어서 산소 보존이 어려운 지경이 되어 후손들이 이를 걱정하던 중에 충남 공주 화죽동 갑자원 명당에 면봉을 모시고 재실을 지어 문미에 염수재(念修齋)라는 편액을 달았으니 염수재(念修齋)란 시경(時經) 대아(大雅) 문왕장(文王章)에 이른바 “그대는 선조를 생각지 않는가? 힘써 덕을 닦으라” 는 뜻을 취한 것으로 후손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말이다.
12시에 예판공 묘소(孝禮)에 분향후 예판공 청양 종중의 유래를 33세 용상 청양지회장으로부터 듣고 난 후 염수재를 출발하여 차안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들면서 경북 김천의 한천재(寒泉齋)로 향했다. 한천재(寒泉齋)는 직제학(直提學)과 호조(戶曹), 예조(禮曹)판서 및 판돈령부사를 지낸 오남. 효신(孝信)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금산(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종중의 재실이다. 공은 워낙 성품이 공명정대하여 재상(宰相)의 비위를 거스른 일이 많았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나 있다가 세상을 떠나셨으며 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실전되어 천안시 구성동에 아버지(恭度公)의 묘소 아래 능선에 제단(祭壇)을 모시고 있다. 공은 슬하에 계동(繼童)과 계남(繼男)의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장자 휘 계동의 후손들은 황해도에 거주하였고 일부 후손들은 서울 경기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차남 계남의 후손들은 대부분 김천(金泉)에 살고 있으며 휘 계남의 장자 승안(承安)의 후손은 공주에 거주하고 차자 승원(承元)의 후손들이 금산 종중을 이루고 있으며 승원(承元)의 자는 희천(希天)이요 호는 학촌(鶴村)이며 일찍이 사마시에 등과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고 연산군의 무오사화 때에 이곳 금산(金泉)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후손들이 이곳에 한천재를 지어 선조의 봉사(奉祀)등 종중의 제반사를 행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33세 영조 대종회 이사의 세세한 강의를 듣고 오후 4시 한천재를 출발하여 대구 팔공산으로 향했다.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기름진 이 땅에 400여 년간 의지하고 살아온 생명의 땅 무태(無怠)!
대구 팔공산 유스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숙소에 여장을 풀고 2시간의 자유 시간을 통해 휴식을 취한 학생들은 7시에 꿀맛 같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8시에 강당에 모여 호판공(大邱 無怠宗中)에 대한 유래를 듣는 시간이다. 인천 이씨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대구 무태 종중이 영남의 명문(名門)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공도공(恭度公)의 장남 효인(孝仁) 호판공(戶判公)의 후손들이 대구(大邱), 용인(龍仁) 삼가율리(三嘉栗里) 진해(鎭海) 등지에 살고 있으며 이를 합하여 호판공 종중(大邱 無怠 宗中)이라 칭하며 가장 많이 번성한 종중이다. 인천 이씨가 대구에 정착하게된 것은 조선 연산조 때(1498~1502년경) 창녕현감으로 부임한 17세 호판공의 손자 말흥(末興)공이 낙향하여 파잠동(현재: 파동)에서 세거하였으며 21세 소재공(疎齋公)의 장남 휘 주( ) 자는 경임(景任) 또는 사여(士汝)이며 호는 태암(苔巖) 또는 육휴당(六休堂)께서 1570년 무태로 이주 정착하여 살게 된 것이다. 태암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셔서 하나를 보고 열을 행하고 일에 따라 알맞게 행하셨으며 일찍이 책을 가지고 팔공산에 들어가서 3년간 공부하셨고 문장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 29세에 어머니 명에 의하여 생원(生員), 진사(進仕) 양시와 동당시 등 3장원(3종의 시험에서 최우수상)이 되셨으며 이퇴계(李退溪) 에게 학문의 연원을 이어받고, 전계동 경창(全溪東 慶昌) 문하에 종유하셨고, 정한강 구(鄭寒岡 逑), 장여헌 현광(張旅軒 顯光), 제현과 친교하며 지내셨다. 3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서낙재 사원(徐樂齋 思遠), 손모당 처눌(孫慕堂 處訥), 곽귀헌 재겸(郭귀軒 再謙), 채투암 몽연(蔡投巖 夢硯), 박총관 충후(朴摠管 忠後), 이군위 종문(李軍威 宗文), 최만경(崔萬頃) 제공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서 공사원(公事員) 으로서 대장(大將)에 추대되었다. 해안창을 점거한 왜병을 토벌하여 왜수 삼명과 적졸 백여급을 참획하였고, 칠곡 팔거에서 3전 3첩의 전공을 세웠으며 전라도 장수에서 수천 왜병을 물리쳐서 크게 공을 세웠으나 39세 때인 갑오년(甲午:1594) 중과부적으로 왜구의 난을 평정하지 못함을 걱정하여 침식(寢食)을 잊으셨는데 이때 체찰사 이한음 이덕형이 오셔서 공과 만나서 군무를 의논 한 후에 공의 충정과 공로를 조정에 고하여 벼슬을 내리게 하려하니, 공이 굳이 사양하고 초야로 돌아가니 체찰사 한음 이덕형이 더욱 깊이 공을 공경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에 산림에 돌아가 글을 읽는 한 선비로서 임란으로 폐허가 된 대구향교(大邱鄕校)를 대구성(大邱城) 동쪽으로 옮겨짓고 친히 그 상량문을 지으셨으며 각처의 서원을 보수하여 후진 양성과 향학 진흥에 힘을 다하였으며 경상도 관찰사로 온 우복 정경세(愚伏 鄭經世)는 남쪽에 와서 훌륭한 벗을 얻었다고 했으며 충익공 이시발(忠翼公 李時發)은 훌륭한 학문을 새롭게 세워 우리 도에 널리 폈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으나, 49세 때인 갑진(甲辰:1604) 2월17일 무태 본가에서 돌아가셔서 3월 22일 청석동에 장사 지냈다는 말씀과 그 후손들의 역사적인 활약에 관한 약사를 33세 곤환(昆換:전 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회장, 현 인천이씨대종회 고문, 성균관 유도회 대구본부장) 인천이씨공도공파 대구지회장의 상세하고 자상한 강의에 학생들은 피곤을 잊고 몰입하는 모습이 진지해 보인다. 밤 9시가 되자 학생자치회가 대구의 밤 행사를 열고 그동안의 여정으로 친숙해진 우정이 하나가 되어 우리가 한 할아버지 자손임을 진하게 확인하는 시간을 남기며 11시에 깊은 잠을 청해야 했다. 어머니 품 같은 팔공산 자락의 유스호스텔의 아침은 상쾌했다. 7시에 아침 식사를 마치자 3일의 일정에 따라 무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으로 향했다.
서계서원은 금호강과 동하천이 감돌아 합류하고 뒤에는 도덕산의 자락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서원의 위쪽 전례문(典禮門)으로 오르면 숭덕사(崇德祠)가 위치하고 아래로는 환성정(喚惺亭)과 화수정(花樹亭)이 선비를 맞이하고 대문(向義門) 앞에는 사적비(史蹟碑)가 자리하고 있다.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기름진 이 땅에 400여 년간 의지하고 살아온 생명의 땅 무태(無怠)! 이곳에 선조(先祖)의 거룩한 정신(精神)을 본받으며 그 후손 들이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계서원(西溪書院)은 정조5년 (辛丑:1781) 사림(士林) 들의 공의(公議) 에 따라(여러 선비들이 뜻을 모아) 조선 태종조의 명신이신 시호 공도공(恭度公) 호 오천(烏川) 자 백중(佰中) 휘 문화(文和) 를 주벽으로 하여 태암(苔巖)공을 배향(配享:옆에 모심) 하게 된 유서 깊은 서원으로서 창건이후 88년간을 사림들과 후손들의 극진한 성의로 춘추전향과 강예 수학을 지키어 왔으나 고종(高宗) 무진(戊辰:1868)에 훼철(헐어서 부셔짐)된 것을 120년 뒤인 1992년 5월 복원하여 매년 음력 9월 9일을 유림 향사일(儒林 享祀日)로 정하여 행하고 있는 서원으로 인천 이씨의 후손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들이 숭모하는 유서 깊은 서계서원에 분향을 하고 선조들의 깊은 뜻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렸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무태에서 배출한 훌륭한 선조님들의 고귀한 정신이 담겨있는 이유재, 심수재, 경암재, 추모재, 오사재, 경모재, 영사재, 필분재. 서산정, 일신정, 금서재, 척첨재, 백운정, 채국정, 정관정, 만송정, 원장루, 회연정사. 효열각 등과 대구 시내에 산재해 있는 유적들을 참배 해야겠지만 쫓기는 시간에 따라 9시 30분 경남 함안의 도천사로 떠나야 했다.
도천재는 함안종중의 총본산
앞서 언급한 데로 도천사는 공도공의 차남 공판공(工判公) 효의(孝義)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함안 종중으로 공판공의 손자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지내신 계운(啓耘) 선조께서 1479년 연산군의 생모 성종왕비(成宗王妃) 윤씨가 폐출되고 1482년 폐비(廢妃) 윤씨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이듬해 연산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께서는 정란(政亂)을 예측하고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시고 낙향하여 스스로 농부 되기를 다짐하고 휘 예자(諱 藝字)를 운(耘)자로 고쳐 함안에 정착하게 됨으로 520년 동안 후손이 번성하고 많은 충신 효열을 배출한 가문으로 인천 이씨의 한축으로 타성이 부러워하게 된 것이다. 도천사는 도천재의 경내 맨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도천재는 함안 종중의 총본산으로서 1655년에 창건하여 1925년에 중수되었으며 도천재의 정문인 심서문(尋緖門)에 들어서면 종사를 논하는 사경당(思敬堂)이 넓게 자리 잡고 있고 대원군의 명필로 현판을 힘차게 써서 걸어놓은 도천재(道川齋)와 맞은편에는 인조대왕께서 진무공신 인원군(仁原君)에게 내리신 교서로 단서죽백(丹書竹帛: 문화재 56호)을 모시는 단서봉안각(丹書奉安閣) 이 있고 중앙 여재문(如在門)에 올라서면 육현(六賢)을 모신 도천사가 엄숙히 자리하고 있다. 도천사는 공도공(恭度公)을 중앙에 모시고 그 후예(後裔)인 증통례원(贈通禮院) 좌통례(左通禮) 교(郊)와 증 공조참의(贈 工曹參議) 원성(元盛)과 증 한성우윤(贈 漢城右尹) 원좌(元佐)와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인원군(仁原君)에 피봉(被 封)된 휴복( 休復)의 5현을 봉안 향사되어 오다가 고종 1년(1864)에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재향이 중단 되었다. 그 후 일본식민통치를 거쳐 조국광복 후에는 격심한 좌충우돌과 6.25 사변 등으로 후손들의 숙원인 도천사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0년 우선 강당부터 신축되고 다음 사우(祠宇)가 3년의 공정 끝에 1999년 5월에 준공에 이르게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만성(晩成) 선조가 추가 합사(合祀) 하게 됨으로 인천이문 의 함안 종중에서는 유서 깊은 백의산 기슭에 도천사를 중건하여 여섯 선조의 충효(忠孝)와 학덕(學德)을 추모하고 계승하는 도장으로 삼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게 된 것이라는 유래를 전 함안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35세 규일 대종회 대의원이 거침없이 풀어가자 학생들은 감명을 받았다. 도천사를 떠나 지리산 호텔로 향했다. 오후 5시 지리산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마친 학생들은 그동안의 여정을 촬영한 사진과 비디오를 모아 CD앨범 편집위원회와 동기회를 구성하기 위한 회의를 열어 열띤 의견의 제시를 통해 회장선출과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저녁 7시가 되자 이번 뿌리교육의 인솔책임자 전원이 훈강생들에게 “이것을 바란다.”란 제목에 당부의 시간이 되어 각 어른들이 현실에 당면한 문제와 미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담은 말씀으로 당부를 할 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훈강생들이 스스로 자율적인 토론회를 열어 인천 이씨의 정체성과 자신들이 미래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충분한 토론을 통하여 자부심과 숙제를 함께 받으며 지리산 호텔에서 3일째 밤을 지새운다.

금계수석(金溪水石)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해 주셨던 장흥땅
날이 밝아 마지막 행선지인 장흥의 금계사로 발길을 재촉하여 금계사에 분향한 후에 형판공 장흥문중의 유래를 36세 성진(전 초등학교 교장)님의 강으로 이어졌다.
금계사(金溪祠)는 공도공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호남관찰사(지금의 도지사)로 계실 때 장흥 땅을 살피심에 금계수석(金溪水石)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해 주셨던 곳이기에 장흥 유림들의 뜻을 모아 세운 사원(祠院)으로서, 서계서원, 도천사와 같이 공도공을 정중앙에 모시고 배향에는 청강(淸江) 승(昇), 강동 현감(江東縣監) 신립(信立), 만수재(晩守齎) 민기(敏琦)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숭모 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벼슬로서 역사의 중심에서 활약을 하였으며 인천 이문을 빛낸 것이다. 장흥 종중의 파조는 형판공(刑判公) 효지(孝智) 이시며 공도공의 사남으로 세종조(世宗朝) 에는 김포현감(金浦縣監), 문종조(文宗朝) 에는 영천군수(永川郡守),단종조(端宗朝) 에는 상호군(上護軍)과 의정부 가정랑관(議政府 加定郞官)을 지내셨고 세조 때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일등으로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 중추원부사(中樞院府使) 형조판서(刑曹判書)등의 요직을 거치며 4분의 임금을 모실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15세 효지(孝智)할아버지와 16세 성해(成諧)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사셨지만 손자 때인 17세 연(椽) 할아버지 때에 전라도(全羅道)땅인 광산(光山) 근처로 옮겨와 사시다가 19세 귀수(貴秀) 할아버지께서 금계수석(金溪水石)의 아름다운 곳이 장흥이란 할아버지(恭度公)의 말씀을 더듬어 장흥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명실 공히 아름다운 고장으로서 조상님들의 보살핌을 듬뿍 받아 자손들이 번성 인천 이씨의 대 종족으로 번창 다복(多福) 한 삶을 영위하며 대대로 그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인천 이문이 타성과 달리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정착하게 된 배경을 보면 선조들이 벼슬을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관직을 따라 옮겨지게 되었으며 살기 좋은 터전에 자리를 잡다보니 전국 곳곳에 널리 분포되어 인천 이씨의 가문을 빛내게 된 것이다. 강의가 끝나고 공도공파종회 진화(進化) 회장은 그간 대종회는 원인재 이건 증축의 막대한 사업을 하느라 1기부터 11기까지는 공도공파종회 주관으로 뿌리교육을 실시하여 왔으나 금년 12기부터는 1차 교육은 대종회가 주관하고 2차 교육은 각종파에서 주관하여 더욱 알찬 자료를 여러분에게 제공하게 되니 어느때보다 보람된 교육이었다고 자부하며,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조에 대한 보답임을 명심하라는 당부의 말을 끝으로 학생들에게 수료증 교부 및 장학금 증서를 교부하고 종강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종친 어른들과 학생들은 오찬을 함께하며 석별의 정을 나눈 뒤 학생들을 각 지파별로 해산함으로써 3박4일의 뿌리교육을 마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지역감정이 팽배해 있고 밖으로는 역사 왜곡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인천 이씨가 젊은이들에게 심어주는 이 뿌리 교육을 예사(例事)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 본다.
뿌리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며 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산이자 고유의 전통문화이다.
인천이씨 학생들은 어느 누구도 지역의 벽은 찾아볼 수 없이 한 핏줄이라는 것만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전통을 배척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추구하기 위하여 공동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단군의 자손이다. 한 핏줄이니 어찌 하나가 되지 않으리. 이 모두가 역사교육과 인성교육이 따라야 될 것이라 믿는다.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기 전에 전통문화 창달, 입시경쟁에 앞서 인성교육이 아쉬운 때라 느껴진다.
인천 이씨는 이 뿌리교육을 통하여 선조님들의 지나온 역사를 가감 없이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잘못된 부분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며 잘된 부분에 대하여는 교훈으로 삼게 하는 것이다.
뿌리에 관한 일이라면 노인들이나 챙기는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에 인천이씨대종회 회장 이동호 박사는 뿌리에 관한 마스터플랜을 짜서 청소년 시절에 뿌리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바른 역사 속에 선조님들의 걸어온 길을 가르침으로써 새로운 역사 인식을 하게 되고 뿌리교육에 동참한 학생들이 서로를 인식하고 net work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미래에 대한 비전과 투자를 하게 된 것이며, 뿌리교육에 참석한 학생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너무나 소중한 공부가 되었으며 이들이 장차 어른이 되었을 때 뿌리교육을 통해 얻어진 선조에 대한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교훈으로 자리 잡아 이들이 오대양 육대주 어디에 있든지 선조에 대한 감사와 조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뿌리교육을 기획하고 진행해온 인천 이씨 대종회 이도하(李道夏) 총무이사는 뿌리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하며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이들도 멀지 않아 이 나라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며 인천 이문을 빛낼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금도 스스로 동기회가 형성되어 교우하며 대종회의 행사에 자진 참여하여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뛰는 모습이 대견스럽다고 한다.
그렇다. 이들에 대한 뿌리교육은 당장 가시적인 성과보다는 이 나라 미래를 위하여 반드시 행해야 할 귀감이며 타성씨도 본받아야할 소중한 교육인 것이다.
www.icl.or.kr (한글 : 인천이씨)
취재 _ 이평제 기자

2004-09-26 18:4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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