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35世 夏龍
작성일 2007-01-08 (월)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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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川李氏의 外孫 南冥 曺植先生의 生家 터 이야기
仁川李氏의 外孫 南冥 曺植先生의 生家 터 이야기

 

(남명 조식선생 생가터)

공민왕(恭愍王)이 요승(妖僧) 편조(遍照)에게 고혹되어 스승으로 섬김이 부당함을 원로(元老) 대신(大臣)으로써 간하다가 왕의 뜻을 거스린다하여 왕비(王妃)인 딸과 함께 평출(平出)되어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으로 쫓겨난 시중공(侍中公) 이작신의 현손(玄孫)충순위(忠順衛) 국(菊)의 집터는 닭의 해(酉年)에 태어나는 아기는 자라서 현인이 된다는 술가(術家)의 말에 따라 친손을 기대 하였으나, 시집간 딸이 이곳 친정(親庭)에 와 1501년(酉年)에 아들을 낳았다.

외조부(外祖父)인 국(菊)은 외손(外孫)을 보게되어 기쁨은 있으나 운(運)이 딸의 시댁으로 가게됨을 몹시 아쉬워했다.

아기가 태어날 때 무지개가 우물에서 방으로 가득 뻗쳤다한다.

그 아이가 바로 창녕 조씨(昌寧曺氏) 식(植)이요 호(號)는 남명(南冥) 자(字)는 건중(楗仲)이시다.

선생은 조선조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룬 대학자(大學者)이며 의(義)와 경(敬)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으로 후학(後學)을 훌륭하게 키워 선생이 타계(他界)한 20년 후인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자(弟子) 정인홍(鄭仁弘).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오운(烏雲)등 50 여명의 의병장(義兵長)이 창의(倡義)기병(起兵)하였다.

1970년에 허물어진 생가 터는 1995년 5월 2일 기념물 제148호로 지정되었으나 아직 복원을 못하고 있다.

인천이씨(仁川李氏)시중공파(侍中公派) 문중에서는 외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생가터 인근에 뇌룡정을 짖고 선생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

(뇌룡정)

****우리 外孫 고고탁절孤高卓節 조식曺植****

☞<욕천浴川>(내에서 목욕하며)

전신사십년전누全身四十年前累-사십 년 동안 더럽혀져 온 몸

천곡청연세진휴千斛淸淵洗盡休-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씻어 버리리라

진토당능생오내塵土(1)能生五內-만약 티끌이 오장에서 생긴다면

직금고복부귀류直今(2)腹付歸流-당장 배를 쪼개어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리

 

 <덕산계정德山溪亭>

청간천석종請看千石鐘-청컨대 천 석 종을 보시오

비대고무성非大叩無聲-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고

만고천왕봉萬古天王峰-만고의 천왕봉은

천명산불명天鳴山不鳴-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네

*曺植-공의 자는 건중楗中이요, 호는 남명南冥, 山海, 방장산인方丈山人등이며 본관은 창령이다. 공의 父는 언형彦亨, 母는 仁川李氏 麗末 侍中 李作臣의 현손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따님인데 연산 7년,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에 있다 했는가? 1501년 小白山 아래 안동에는 퇴계 이황이, 智異山 아래 삼가 토동에서는 남명 조식이 태어났다.

토동은 풍수상으로 '토끼가 달을 안을 듯 누워있는 형상<玉兎望月形>' 이라 하여 명당으로 치는 곳이다. 당시 어느 풍수가가 이곳에서 큰 인물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하는데 마침 토끼의 배 부분에 위치한 집이 남명의 外家였고 예언대로 남명이 태어났다고 전한다. 또 辛酉年 유월에는 꼭 성현이 날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다고 한다. 공은 5세 무렵까지 외가에서 자랐으며 부친이 급제하자 서울로 이사하였다. 어려서 부친에게 글을 배웠고 小學期에는 이윤경李潤慶, 이준경李浚慶 형제들과 어울리며 학업을 닦았다.

18세 때 성수침成守琛과 성운成運 종형제를 만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하루는 북악으로 성수침을 찾아갔다가 그 은거 생활이 속세의 누를 끊은 것을 보고 마음에 즐겨하여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 벼슬하지 않고 지리산 아래에 살았다.

20세에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고 숙부가 멸문을 당하자 이를 슬퍼한 선생은 아예 벼슬을 단념하였다.

25세 무렵 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 허형許衡의 '伊尹의 뜻에 뜻을 두고 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 일을 해 내고 초야에 숨어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니 벼슬에 나아가서도 하는 일없고 산림에 처해서 지킨 것이 없다면 뜻한 것, 배운 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라는 구절을 읽다가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26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고향인 삼가에 장사지내고 삼 년 시묘侍墓 생활을 하였고 가난과 싸우면서 민생의 고초를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에 山海亭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갔다. 이 정자 이름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학문을 이루겠다는 큰 뜻이 숨어있다.

38세엔 회재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에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48세 때 다시 외가인 토동으로 돌아와 계복당鷄伏堂(계부라고도 읽음)과 書室인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고 또한 처사로서 언론을 발하여 국정을 비판하였다. 계부당은 덕을 숭상하는 것이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 같다는 뜻을 취함이었고 뇌룡雷龍은 장자의 재유在宥 편에 나오는 <연묵이뇌성淵默而雷聲 시거이용현尸居而龍見> 즉, '연못처럼 고요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세상을 울리고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신묘한 조화를 부린다'는 뜻이다. 또, 그 곁에 쓰기를 '뇌성은 어두운 곳에서 나고 용은 못처럼 잠기는 데서 나타난다<뇌칙회명雷則晦冥 용칙연해龍則淵晦>' 라고 썼다. 이런 당호堂號를 붙인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世道를 부지하는 것이 그 시대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뇌룡사 시절, 이 곳에서 유명한 정인홍, 문익성, 오건, 외손서外孫壻 곽재우 등 많은 제자들이 배출된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내암萊庵 정인홍을 말하기를 '우리 역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정치가'라 칭했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光海가 실각하자 西人들에 의해 89세에 참형을 당한다. 결국 정인홍에 의해 스승인 남명마저 왜곡되고 폄훼貶毁가 이루어졌다고 사가들은 보고 있다.

 

 잠깐!

『뇌룡雷龍-장자 재유在宥 편에

'군자가 부득이 천하에 군림하는 경우에는 무엇보다 無爲를 최고 방침으로 삼게 된다. 이 無爲에 의해서만 비로소 백성들은 그 본성의 진실에 따라 생활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겨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면 천하를 맡겨도 좋을 것이고, 자기 일신을 천하 다스리는 것 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천하를 기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만약 자기 오장五臟에 깃들인 생명을 손상시킴이 없고 그 총명(자연히 갖추어진 耳目의 활동)을 다른 외부의 사물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면 시동처럼 고요히 앉아있어도 용처럼 출몰하고 심연처럼 침묵하고 있어도 우레 같은 소리를 내고 정신은 자유로이 움직이면서도 자연의 도리에 부합하고 유연히 앉아 아무 일도 안 하건만 만물로 하여금 공중을 떠도는 티끌처럼 생을 즐기게 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라면 세상을 다스리는 따위의 일을 생각할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君子不得已而 臨天下 莫若無爲 無爲也 而後安其性命之情 故貴以身於爲天下 夫可以託天下 愛以身於爲天下 則可以寄天下 故君子苟能無解其五臟 無擢其聰明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神動而天隨 從容無爲 而萬物炊累焉 吾又何暇治天下哉 : 莊子 在宥>?' 라 하였다.

(도움⇒리임 臨-어떤 일에 임함, 成王將欲 臨其政이라 보임. 오장五臟-五行說에 의하면 仁은 간장肝臟, 義는 폐장肺臟, 禮는 심장心臟, 知는 신장腎臟, 信은 비장脾臟에 깃 든다 함. 시尸-주검. 고대 제사에 신주 대신 앉히는 시동. 탁擢-뽑다, 제거하다. 과거 급제를 탁제擢第라고도 함. 취루炊累-티끌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가暇-겨를, 틈. 재유在宥-있는 그대로 놓아두고 간섭하지 않음. 故貴以身....이 구절은 老子에 '故貴以身爲天下者 可以 寄天下 愛以身爲天下者 可以 託天下'라 보임. 爲天下-爲는 다스리다)

*정인홍鄭仁弘-호는 내암萊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내암이 어릴 때 산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그 때 마침 감사가 당도하여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찾은즉 바로 과부집 아이였다. 그래서 기이하게 여기고 데려가 묻기를

"너는 시를 지을 줄 아느냐?"

하니 인홍은 '잘 짓지 못합니다' 하였다. 그런데 감사가 탑 주변의 왜송矮松으로 글을 지으라 하니 인홍은 즉석에서

단단고송재탑서(短短孤松在塔西)-짧고 짧은 외로운 솔이 탑 서쪽에 서 있으니

탑고송하불상제(塔高松下不相齊)-탑은 높고 솔은 낮아 가지런하지 않네

막언금일고송단(莫言今日孤松短)-오늘날 외로운 솔이 짧다고 말을 마소

송장타시탑반저(松長他時塔反低)-솔이 자란 다음 날에 탑이 도리어 짧으리

라고 지었다. 감사는 깨닫고 감탄하며

"후일 반드시 현달하리라. 그러나 뜻이 참람하니 부디 경계하라."

하였다. 그후 인홍은 남명 문하에 수학하여 세상에서 존대하는 바가 되었다. 그가 패륙敗戮됨에 미쳐서는 그 문도들이 모두 비분강개하여 한결같이 나아가 벼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내암은 황간(黃澗) 현감 시절부터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고 서인 정철, 윤두수 등을 탄핵타가 해임되어 낙향하기도 하였다. 임진난에 합천에서 김면(金沔)과 의병을 일으켜 성주에서 왜병을 격파하니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南人 유성룡이 화의를 주장하였다 하여 탄핵으로 사직케 하였고 광해 4년에 우의정이 되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폐하고 증살시키게 하였으며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에 올랐다. 이후 궤장 杖을 하사받았으며 인목대비를 西宮에 유폐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인조가 반정하자 서인에 의해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이상은 대략의 내암 이력이다.

그러나, 근년의 지방지에 그의 행적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

「山林정승 정인홍의 죄명은 폐모살제廢母殺弟였는데 인목대비 유폐에 관여한 바 없고 영창에 대해선 신원伸寃을 요청하는 상소까지 올렸다. 반정 세력이 내암을 죽인 것은 남명의 기개를 빼닮은 내암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고 나아가 西人 정권을 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단재 신채호는 '우리 민족 역사상 대표적 인물은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으로 이들 중 을지문덕과 이순신으로부터 행동과 정신을, 정인홍으로부터 그릇돼 가는 현실에서 혁명적 정신을 찾을 수 있다' 하였는데 소위 단재의 삼걸론三傑論이다.」

라는 등의 내용이다.

(도움⇒계축옥사-박응서, 서양갑 등 權門 서자 7인이 강변칠우라 하여 당을 모아 서얼철폐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주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화적질을 일삼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는 이들을 이용해 영창대군을 몰아낼 구실거리로 삼는다. 마침내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 등과 영창대군을 제거,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는데 이를 계축옥사라 하였다.)』

 

61세 무렵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에 산천제(山川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많은 영재를 모아 가르쳤다.

72세에 산청군 시천면에서 조용히 천수를 다하니 광해 7년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兼) 영경연(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官)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에 증직되고 文貞<도덕박문왈문(道德博文曰文), 직도불요왈정(直道不撓曰貞)>이란 시호가 내렸다. 성호 이익은

"공이 병이 나서 급하므로 감사가 장계를 올려 아뢰자 어의를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간호케 하고 급기야 작고하자 특례로 대사간을 증직(贈職)하였다. 그를 예우함이 이토록 극진하였으니 족히 한 세상을 풍동(風動)할만 하였다. 진실로 이런 분이 아니었다면 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는가? 고인의 인격이나 언행을 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벽립만인(碧立萬)(4)으로 공을 지목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라고 성호사설에 적고있다.

공이 평소에 학문을 닦음에 있어 방에 앉아서 졸음이 오면 칼을 어루만지며 자지 않으니 칼 머리에 명銘이 있어 '안으로 밝은 것은 敬이요, 밖으로 끊는 것은 義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 하였다.

공이 산야에 물러나도 능히 세상일을 잊지 못하였는데 매양 달이 밝으면 홀로 노래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눈물을 흘렸다. 곁의 사람들은 능히 그 뜻을 알지를 못하였다<退去山野不能忘世 每値皓月獨悲歌竟涕下 傍人殊不能知之>. 일찍이 선비들과 함께 말을 하다가 當世의 정치의 득실과 민생의 곤궁한 데 말이 미치면 팔을 걷어붙이고 목이 메어 눈물까지 흘렸다<嘗與士子語及時 政闕失生靈困悴 未嘗不扼腕(5)咽至於流涕>한다.

특히 뇌룡정 시대에 올린 사직소는 문정왕후를 과부라 하고 명종을 고아라 하여 일대 파문이 일기도 하였다. 즉 임자년에 두번째 단성 현감으로 부르니 권간權奸 윤원형이 국정을 농락하고 있을 때라 벼슬에 뜻이 없음을 상소하여 사직하고 겸하여 시폐를 아뢰기를

"정숙하신 대비께서는 한 과부일 뿐이며 전하는 어리시어 선왕의 한 고아<慈殿塞淵只是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不過先王之一孤嗣>에 지나지 않으니 百千 가지 재변과 억만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음악이 슬픈 곡조를 띠고 흰옷을 입으니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하니 임금이 과부라는 두 글자가 불손한 데 가깝다고 기뻐하지 않고 대비에게 욕이 미쳤다 하였다.

이때 이제신李濟臣이 송사宋史 영종기英宗記를 뽑아 구양수가 자성태후慈聖太后에게 고한 '폐하는 깊은 궁궐의 한 부인이요, 臣 등은 5-6서생<陛下深宮之一婦人 臣等五六書生>'이라고 한 말을 들어 변명하기를

"조식이 옛사람이 임금에게 고한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를 지극히 말한 것이지 거만한 말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 또한 일사逸士로서 대우하여 마침내 죄주지 않았다.

명종 만년에 사정전에 입대한 남명에게 上이 묻기를

"옛사람이 세 번 찾아가지 않으면 초려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라고 물으니 남명이 대답하기를

"이는 제갈양의 일이온데 반드시 감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양이 거의 50년을 경영하였으되 겨우 정족鼎足(삼국 정립)을 이루었을 뿐 능히 한나라의 왕실을 부흥시키지 못하였으니 그 재주를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대개 남명을 누차 불렀으나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임금이 '세 번 찾아감(삼고三顧)' 이란 것으로 물었는데 남명의 대답 역시 '감히 감당하지 못함(불감당不敢當)' 이란 것으로써 말하였던 것이다.

공이 일찍이 문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많은 사람을 얻어 각 각 많은 일을 부탁하고 나는 오히려 물러앉으려 하는 것은 재주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가 평생에 단 하나 장점이 있는 것은 죽어도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사군자의 큰 절개는 오로지 출처出處 한가지 일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경오년庚午年에 남명이 퇴계 이황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기도 같은 해에 났고 살기도 같은 道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어찌 명이 아니랴?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게다."

하였는데 과연 그 후 두 해가 지나서 임신년壬申年에 세상을 떠났다.    공이 임종시에 제자에게 말하기를

"후세 사람이 나를 處士라고 하면 가할 것이나 유자儒者로 지목한다면 실제가 아니다<臨終謂其學徒曰後人以我爲處士則可矣 若目以儒者非其實也>."

라고 하였다. 문인이 더 가르침을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敬義 두 글자는 日月과 같아서 하나도 폐하지 못할 것이다<公曰 敬義二字如日月不可廢>."

라고 말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남명이 어찌 동방에만 再生할 인걸이겠는가?"

하였고, 이율곡은 말하기를

"世道를 만회한 공은 아마도 동방 제자諸子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 천 길 벽壁이 우뚝이 서 있는 기상 같은 것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  

또,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이르기를 '공의 높은 풍도와 준엄한 절개는 사림의 儀表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만물 밖에 홀로 우뚝 서서 높이 한 세상 위를 보았다. 그 맑은 풍도와 엄전한 절개는 소부巢父와 許由와 읍揖하고 변수卞隨와 백이伯夷를 벗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뭐라 해도 敬(마음을 밝힘)과 義(도덕적 용기)로 대표된다. 공은 내적 존심양성存心養性을 바탕으로 敬을 내세우고 마음이 움직였을 때 外物 생활의 기준으로 義를 내세웠다. 즉, 철저한 자기 수양과 거리낌없는 명분이야말로 남명사상의 요체라 할 것이다.

성호사설 天地門의 백두정간白頭正幹에서 이익은 말하기를

"퇴계가 태백산과 소백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 나라 유학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 계통을 받은 인물들은 깊이가 있으며 빛을 발하여 예의가 있고 겸손하며 문학이 찬란하여 수사洙泗의 기풍이 있었다. 남명은 지리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 나라에서 기개와 절개로써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후계자들은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어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위험에도 끄덕하지 아니하여 독립적 지조를 가졌다<退溪生於大小白之下爲東方之儒宗 其流沈涵濃郁揖遜退讓文彩彪映 有洙泗之風焉 南冥生於頭流之下爲東方氣節之最 其流苦心力行 樂義輕生 利不能屈 害不能移 有特立之操焉>."

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남명 사상은 후일 義兵으로, 독립운동으로 그 사상적 맥이 면면히 이어졌으니 그 끼친 바 유분遺芬이 실로 넓고 깊다 하겠다.

지금도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德山書院 앞 세심정洗心亭 옆에 위의 '浴川'이란 시가 자연석에 아름다운 글씨로 새겨져 있어 오가는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도움⇒고고孤高-혼자서 유달리 고상함. 탁절卓節-탁월, 학문을 갈고 닦음. 곡斛-열 말들이. 당, 상( )-아마, 갑자기, 문득 당. 고 -쪼갤. 고복 腹-배를 가름, 할복割腹과 同. 출처出處-벼슬에 나아가거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 액완扼腕-움켜잡을 액, 팔뚝 완. 즉 성나고 분하여 주먹을 불끈 쥠. 경열  咽-목이 메어 흐느낌.  咽-목멜 경. 인, 열咽-목구멍 인,열. 췌悴-파리하다, 근심, 마음 아파함. 벽립만인碧立萬 -절벽이 만 길이나 됨, 즉 장부의 기개를 비유함. 일사逸士-뛰어난 선비, 숨은 선비. 性理大全-宋의 도학자 120家의 설을 수록한 책. 심함沈涵-깊고 넓은. 농욱濃郁-문채가 빛을 발함. 읍손揖遜-겸손. 퇴양退讓-양보. 표영彪映-밝게 비춤. 수사洙泗-공자가 살던 곳의 물 이름으로 洙水와 泗水, 즉 수사 사이에서 공자가 시서 예악을 설하자 사방에서 제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함. 두류頭流-智異山. 유분遺芬-끼친 향기.

*성수침成守琛-성종, 명종 대의 사람으로 조선의 은사隱士이다. 호는 청송聽松, 시호는 文貞, 본관은 창녕이며 아들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이다.  조광조의 제자로 형제가 다 명망이 높았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자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였다. 그 후 벼슬을 내렸으나 다 취임하지는 않았다. 글씨를 잘 써 필명이 높았고 死後 좌의정에 추증 되었다.

*허유(許由)와 소부(巢父)-요(堯)가 천하를 허유에게 물려주려 하자 사양하고 기산에 숨어 버림. 그 후 다시 九州의 長을 삼으려 하자 더러운 말이라 하여 귀를 씻었다는 고사로 유명함. 소부는 나무 위에서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허유가 귀를 씻는 모습을 보고 그 연유를 묻자 허유가 말하기를

"요임금이 저번에는 나에게 천하를 넘겨준다 하더니 이번에는 九州의 長을 삼는다고 했다네."

라고 말하자 소부는 물을 먹이려던 소를 끌고 상류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허유가 그 이유를 묻자 소부는

"더렵혀진 귀를 씻은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상류로 가서 깨끗한 물을 먹이려고 그러네."

라고 말했다는 고대의 어진 현자.

*변수卞隨-은나라 탕왕이 변수에게 천자의 위를 양위하려 하니 天下는 아무짝에도 쓸 곳이 없다고 받지 않았던 고대의 賢者.

*정구(鄭逑)-자는 道可, 호는 한강(寒岡), 청주인으로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조식, 이황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창녕 현감 때는 善政으로  生祠堂이 세워졌으며 당시 명 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인조반정 후 吏判에 추증됨.)

(35世 夏龍 수미초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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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인로의 학문적 세계 공도공종회 2007-01-08 1482
14 이인로의 파한집 발문 공도공종회 2007-01-08 1239
13 파평윤씨정정공파 묘역조사보고서(윤번묘역) 공도공종회 2007-01-08 929
12 낙헌 이장용 시세계 연구 공도공종회 2007-01-08 1016
11 연구 논문 공도공종회 2007-01-08 814
10 오천 이문화의 생애와 경세사상(經世思想) 공도공종회 2007-01-08 820
9 진락공부도탑(眞樂公浮屠塔) 공도공종회 2007-01-08 726
8 진응탑비(眞應塔碑) 공도공종회 2007-01-08 753
7 청평거사 이자현 [100] 35세 하룡 2007-01-08 2735
6 문정공(文正公) 이지저(李之) 35세 하룡 2007-01-08 1422
5 (特別寄稿)仁川李氏의 뿌리와 내력 34世 明植 2007-01-08 842
4 人本主義와 事本主義의 調和 仁川大學校 敎授 李永燦 2007-01-08 778
3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愛國志士 池吾 李慶熙) [1] 35世 容夏 2007-01-08 1099
2 시인 이장희 시비(詩碑) 35世 容夏 2007-01-08 2661
1 仁川李氏의 外孫 南冥 曺植先生의 生家 터 이야기 [1] 35世 夏龍 2007-01-0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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